지리산 성중종주(성삼재~천왕봉~중산리) | 지리산 종주 대회 후기
활동하는 까페에서 주최했던 2022년 6월 12일 총 33.4km(결승점 이동으로 33.7km)의 지리산 종주 대회(성중종주 : 성삼재~천왕봉~중산리)를 다녀온 후기. 11시간 58분 45초로 기록증을 발급해주는 제한 시간 12시간내 겨우 완주할 수 있었다.
[참석 동기]
코로나로 인해 길어진 재택근무의 단점 중 하나가 신진대사량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재택 근무의 편안함을 무색케 할 정도로 급한 일들이 생기고 1주일에 3~4번씩 밤에 conference call을 해야 하고 그야말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다. 평소 자주 즐겼던 등산도 거의 하지 못했던 차에 지리산 성중 종주 대회 소식은 그야말로 스트레스 해소와 더불어 어떤 전환점이 될 것만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덜컥 참가 신청을 했는데, 종주 산행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리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한 2014년 이래로 나의 산행 스타일은 보통 사람들의 평속(2~3km/h)에 여유롭게 산과 경치를 즐기며 길과 지형 특성까지 살피며 걷는 그런 것이었다. 해가 바뀔수록 산에 대한 탐닉은 발전해 나갔고 가끔은 종주 산행과 같은 극적인 트레킹을 갈구하기도 했지만 함께 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저의 마음과 항상 일치하지 않아 늘 계획을 세우다 꺾이는 일이 잦았다. 혼자 산행을 하는 것에도 그리 익숙지 않아서 그나마 마음 맞는 친구, 동료 몇몇이 다니곤 했지만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하이커들이었다. 당일 산행으로는 15km내, 1박 2일 산행 정도는 되어야 30km 정도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다고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데려다 주는 안내 산악회를 한 번도 이용한 적도 없다.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속에서 제한된 조건에서 하는 액티비티들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게 느껴진 탓이 있는 것 같았다. 2015년 중반부터는 백두대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아직까지 틈틈이 구간별로 하고 있지만 아직 완료하지 못한 것이 위와 같은 이유가 가장 크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는 회사 선배가 오래전부터 주말마다 30~50km씩 산행을 한다는 것을 들으며 늘 대단하다는 것과 이해불가라는 마음이 공존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이해불가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 그 분과의 대화를 곱씹어 보면 한 번도 트레일 러닝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기에 단지 그 분의 입장에서 등산이란 무장공비들이 하는 훈련을 대체하는 액티비티쯤으로 여기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거다. 그저 이 멋진 절경을 즐기지 못할 뿐 아니라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왜 하느냐!라는 편협한 생각이 오랫동안 머리속에 있었고, 말하자면 나는 트레일 러닝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오랜 산행을 하다 보니 그러한 스타일의 산행과 종주가 자신의 산행 스타일이나 운동 스타일에 맞는 것이고 또 그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트레일 러닝이 보편화되는 요즘에서야 깨닫게 된다. 트레일 러닝이라는 장르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어쨌든 이런 배경속에 덜컥 종주 대회 신청을 해버렸으니 한 번 해봐야 하는데 이제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이동해보는 것,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나를 시험해 보는 것, 다운힐과 평지는 뛰듯이 이동해 보는 것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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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 준비]
6년 전에 친구와 1박 2일로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가 폭우로 완주하지 못하고 백무동으로 하산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서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것이니 사실상 첫 종주 도전이 되는 셈인데, 그래도 체력적으로는 항상 자신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니 “대회”이고 시간 제한도 있는 것이니 시간내 도달하기 위해 보다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상황이었다. 코로나 이 후로 등산은 고작 분기 행사 정도 수준이었으며 재택 근무와 겨우내 최대로 증가한 체중(179cm에 84.1kg) 하며……
게다가 30km를 훌쩍 넘는 거리를 무박으로 해 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평상시대로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그 날 강행하면 안될 것 같아서 약 두 달 남짓(3월 26일부터 6월 8일까지) 퇴근 후 공원 러닝을 몇 km씩 했다. 러닝…… 이 또한 정말 20대 이 후로 처음인데 그 당시와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몸을 다치지 않고 보호하면서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좀 하면서 한다는 것? 첨단 정보화 시대의 이점을 활용하니 러닝 방법, 효율, 장비 정보 등을 손쉽게 득할 수 있어 이러한 정보와 러닝 기록을 바탕으로 러닝을 하니 지루하고 힘든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동기부여가 주어져 지속할 수 있는 액티비티임을 깨달았다. 약쟁이들이 겪는 high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running high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다만 나이가 있다 보니 무릎과 발목에 신경을 써야 했는데 트레일 러닝화에 무릎보호대를 했음에도 젊었을 때 처럼 뛰었더니 무릎은 괜찮은데 확실히 체중과 가해지는 하중이 다리 아래쪽 즉, 발목 주변에 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뛸 수 있는 체력은 충분히 남아 있는데 300m 정도 뛰니 다리 아래쪽의 로드가 크게 느껴져서 도저히 뛸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백미터를 뛰다 걷다를 했다. 하지만 이것을 꾸준히 하면 뛰는 거리가 늘어나고 익숙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거의 한달이 다 되도록 뛰는 거리가 전혀 늘지 않았고 느껴지는 하중은 첫날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무릎은 괜찮았는데 왼쪽 발목 통증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러닝의 방법론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다 보니 보폭을 좀 짧게 하고 미드풋(발바닥 전체를 디디기) 주법을 하니 놀랍게도 곧바로 발목이 아프지 않았고 한 번에 뛰는 거리가 수백미터에서 1km~1.5km까지 훅 늘어났고 지금은 기본 2km를 지속해서 뛸 수 있다. 자전거 라이딩으로 생각해보자면 고단 기어를 저단으로 바꾸고 대신 케이던스를 늘린 것이다.
또 한가지, 군대에서 매일 매일 새벽 구보를 하 듯 몸이 힘들어도 체력 증진을 위해서 매일 러닝을 했는데 딱 한 달 만에 급기야 새벽에 코피를 쏟고 말았다. 피곤해서 코피가 난 것은 몇 십년만(?)인 것으로 놀랐다. 피곤함을 느꼈고 그 것이 어떤 limit를 넘겨 코피를 쏟아낸 것인데 이런 상태 경험을 통해 몸에 맞는 운동량을 튜닝해 갔다. 1~2주만에 하는 운동이나 액티비티들은 조금 심해도 상관이 없는데 daily base로 하는 운동에는 이러한 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달리기 기록을 보니 며칠 쉰 다음 했을 때 기록(속도 관점)이 좋아지고 매일 연속으로 하면 기록이 조금 떨어진다. 꾸준히 하면 장기적으로는 체력이 증가해서 기록도, 거리도 증가하는 방향이겠지만 단기간으로 보면 최상의 성능을 위해선 적당히 쉬고 몸의 상태를 최고로 만든 후 해야 한다는 것이다.
5월 1일에는 아이들과 축구를 했는데 어리석게도 트레일 러닝화를 신고 하다가 순간적인 방향 전환을 하다가 그만 오른쪽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잔디구장 그라운드라서 충격 흡수를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내던져 충격을 최소화한 정도였다. 그래도 극심한 발목 통증을 겪고 말았다. 다행히 소염진통제를 먹으며 다음 날 약속했던 10km 산행도 조심스럽게 걸으며 다녀올 수 있는 정도였고 1주일 정도 지나니 다시 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밑창이 매끄러운 방향 전환에 도움이 되며 경사진 곳에서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구조라고 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장비들이 다 용도가 있는 것이고 만능 대응이 아닌데 말이다. 푹신한 대신 발목 안정성은 떨어질텐데 이걸 신고 축구를 하다니…… 이 날 이후로 발목보호대를 구매해서 착용을 했는데 트레일 러닝화의 발목에 대한 취약점을 잘 잡아주는 것 같아 좋았다.
3월 26일부터 6월 8일까지 2달 여간 러닝을 하면서 느낀 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 매일 뛰니까 몸이 강화된다기보다 피곤함이 누적된다 -> 10대, 20대, 30대 때를 생각하고 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은 청춘이나 몸의 회복 속도는 젊은 시절과 같지 않은 것을 몸소 체험.
– 러닝도 자신에 맞는 자세가 중요하다 – 보폭을 줄이고 케이던스를 높이니 다리에 걸리는 하중이 완화되어 체력 한도내에서 지속적으로 달릴 수 있다.
– 지속적인 러닝과 몸의 상태 변화를 체크하면서 몸에 맞는 주법과 거리,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필요한 장비들을 효과적으로 튜닝 및 사용하기. 러닝이다 보니 딱 두가지 측면 무릎과 발목이 걱정이 되었는데 무릎보호대와 발목보호대가 나에게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특히 다리의 털을 따갑게 빼앗아 가는 테이핑보다 보호대가 더 편하다. 쉽게 탈착도 가능하고… 특히 발목보호대는 얇아서 신발을 신어도 끼는 느낌은 없었다.
– 좋아지는 신체적 수치들 – 체중 감소, 혈압 감소(136에서 124로 저하) 등 좋은 방향으로 변화됨(피수치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으나 유산소 운동 경험상 언제나 개선됨). 체중은 평소 먹던대로 먹으면서 오로지 1주일에 3~4차례의 러닝만으로 2달여간 3kg을 감량했다. 갓난 아기만큼의 중량이 빠지니 그나마 몸이 조금 가벼워진다. 다만, 예전과 다르게 운동 조금한다고 쉽게 빠지지는 것은 아니다.
– 대사량 증가 – 많이 먹어도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체중이 다시 쉽게 늘지 않는다.
– 정형외과와 한의원 치료에도 소용없었던 몇 달간 고생한 목 아픔 증상(목디스크 초기 증상)이 상당히 완화됨 – 가만 있어도 목과 어깨가 아플만큼 심했는데 신기하리만치 좋아졌다. 러닝을 하면서 각 연결부 근육들에 열이 발생하고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 자신감이 증대된다.

운동 기록이다. 두 달여간 러닝 207km, 라이딩 214km, 등산 35km 정도다. 대단한 기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로지 이것만으로 몸무게 3kg 정도는 뺐다.
[종주 대회 준비물과 이동]
운행은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면,
– 모자, 헤드랜턴(새벽에만), 선글라스, 반팔T셔츠, 팔토시, 반장갑, 시계, 벨트(카메라 브라켓용도), DSLR 카메라 + 35mm 단렌즈, 반바지, 레깅스, 양말, 무릎보호대, 발목보호대, 스틱, 트레일 러닝화
배낭에는 다음과 같다.
– 휴대폰, 보조배터리, 에어팟, 여분 양말x2, 여분 마스크, 바람막이, 고프로, 여분 T셔츠, 썬크림, 바나나x3, 체리 한 봉지, 빵x2끼용, 에너지젤x6, 힐링티x2, 부샤드초콜렛 with 씨솔트, 얼린 파워에이드 500ml, 베일리스를 탄 커피를 힙 플라스크에 담아 얼림, 물 500ml, 화장지/물티슈, 의약품(메디폼, 소염진통제, 근육이완제, 파스)
날씨예보에 따라 준비물이 추가된 것은 바람막이, 카메라와 렌즈/벨트였다. 전날인 토요일 낮 날씨가 서울, 인천이 30~31도인데 12일 지리산 일기예보상에 한낮의 기온이 11~13도 밖에 안되는 것을 보고 바람막이를 가져갔는데 성삼재 도착해서 잠시 느낀 쌀쌀함 몇 분간 입고 입을 일은 없었다. 수년 전 2차례의 천왕봉 등정때마다 안개 구름에 휘감겨 천왕봉 풍광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예보상 지리산은 쾌청인 것을 보고 카메라를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1.1kg의 카메라와 렌즈를 담으면서도 내 살 3kg를 내준 대신 1.1kg를 취하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베일리스를 탄 커피…… 이것은 버스에서 잠을 못 잘 경우 결국 밤을 꼴딱 새고 종주 산행을 해야할 판이기에 뭔가 졸립다 싶으면 카페인의 도움을 좀 받으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베일리스는 초콜렛, 아이리쉬 크림, 위스키가 섞인 부드러운 맛의 리큐르(17도)다. 우유나 커피에 타서 먹으면 아주 좋다. 수 년 전 미국 출장길에 델타항공의 기내 서비스로 먹어본 뒤로 좋아서 산행이나 백패킹 때 자주 애용하고 있다. 달달하고 카페인까지…… 얼음 위에 커피를 내린 후 베일리스를 조금 탔다. 그리고 힙플라스크에 담은 후 얼렸다.
부샤드 초콜렛 & 씨솔트 : 초콜렛에 소금이 박혀 있어서 달짝 짭조름해서 산행시 에너지원으로 좋다.
어쨌든 이렇게 쟁여 넣고 배낭을 매어 보니 오우~ 생각보다 엄청 무겁다. 하지만 내 살 3kg를 내줬으니 괜찮아라고 다시 되뇌였다.
6월 11일(토) 밤 10시 양재를 출발한 전세 버스는 성삼재에 12일 새벽 2시에 도착했다. 기사분이 야간이라서 좀 헷갈리셨는지 천안 분기점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 우측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지나쳐서 급 정거를 했다. 몇 미터 지난 갓길에 세우고 후진을 해서 다시 천안논산고속도로로 진입을 하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철렁했다. 잠을 자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토요일 날씨가 좋았잖아?! 자정을 넘어 당시 시계를 보니 새벽 12시 47분. 순천완주고속도로 전북 임실의 사매4터널을 들어설 무렵 차가 또 급감속을 했다. 앞을 보니 불과 몇 미터 앞만 보이는 짙은 안개가 닥쳤다. 지도를 보니 임실의 오수천을 지나는 부근이었는데 물안개가 심하게 피어났나 보다. 순간 또 가슴이 철렁철렁, 잠을 자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시 한 숨도 못 잤고 좀 걱정스러웠다. 차라리 토요일 오후 늦게 낮잠을 잤었어야 했다. 성삼재에 오르는 길에서도 마을에서 길을 한 번 잘 못 들어서 차를 돌리기도 했지만 무사히 성삼재에 도착했다.

[지리산 성중 종주]
성중종주가 우리나라의 여타 종주와 비교해 더욱 매력적인 것은 백두대간의 진행 방향 기준으로 보면 마지막 구간인데다 숭고(崇高)하기도 하고 숭고(崧高)한 지리산 마루금을 탐닉할 수 있다는 것이다.
33.4km(결승점 이동으로 실제로는 약 33.7km)의 전체 코스를 보기 편하게 아래와 같이 구간별로 정리해보고 각 구간별 목표 시간을 대략 가늠해 두었다. 절대 파란길로의 하차는 없으리라 다짐하면서……

처음에는 12시간내 완주 목표로, 그리고 2달 정도 체력 보강을 조금 하면서 자신감을 쌓고, 또 다른 사람들의 후기들을 들여다보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목표를 약간 상향 조정을 했다. 최종 목표는 10시간 10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위와 같이 준비한 나에게는 얼마나 무모한 목표였는지는 완주후에 알게 되었다.
1, 성삼재~삼도봉
참가자들이 스탭분들의 안내에 따라 출발점에 모였다. 텡그리님 이하 운영진분들의 응원에 참가자들의 사기충천된 함성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많은 분들이 초반 오버페이스를 하지 말 것을 주문해왔고 여지없이 출발 전 그런 조언들이 곳곳에서 들려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몸소 체험을 해보지 않았던 나의 전략은 이랬다.
초반 오버 페이스를 하든 안하든 후반에 지치기는 매한가지이고 12시간내 완주하기 위해서는 완만한 노고단 고개와 이후 내리막 또는 평지인 임걸령까지는 오버페이스를 하자.
오전 3시 정각, 출발하자마자 아니 웬 걸, 모든 사람들이 다 뛰네? 어어? 하면서 나도 모르게 뛰어진다. 하지만 50미터 정도 뛰니 숨이 꽉 차올라 더 이상 뛰지 못했다. 동네 뒷산을 가든, 설악산 한계령의 된비알을 치고 오르든 초반 몇 십미터부터 몸이 힘듦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같은데 여지없다. 이 후로는 나름 빠른 속보로 걸었는데 노고단 고개까지 추월만 당했지 제가 제낀 기억은 없다.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3시 33분. 노고단 고개에서 임걸령까지 내리막과 평지인데 길도 그리 험하지 않아서 전체 구간 중 가장 꽃길이다. 여기까지 오버 페이스를 하기로 했다. 몸이 무거워 오르막은 힘에 부쳐도 평지와 내리막은 오르막과 불균형하리만치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 임걸령에 도착한 시간이 4시 14분. 여기까지 평속이 4.9km/h로 예전에 노고단을 오를 때 평속이 2.5~3km/h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나로서는 엄청난 오버 페이스다.
발목을 접질리다.
임걸령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사면의 축축한 돌을 디뎠는데 오른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한달여전 축구하다 접질린 바로 그 부위다. 악 소리와 함께 스틱으로 지탱해 넘어지진 않았지만 상당한 통증이 왔고 순간 드는 생각이 여기서 이렇게 끝나나? 안되는데… 뒤에서 같이 오시던 어떤 참관인께서 괜찮냐고 걱정 어린 질문을 해주셨는데 저의 머리속은 그냥 복잡했다. 그런데 다행히 몇 발작 디뎌보니 걸을만 했다. 그나마 발목보호대가 완전히 꺾이는 걸 잡아준 것으로 추정이 되고 스틱으로 무너지는 몸을 지탱해 준 것이 심각하게 가도록 하진 않은 것 같다. 계속 진군했다.
삼도봉까지 쉬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르막인데다 발목 때문에 임걸령 쉼터(4:19AM)에서 걸터 앉아 물한모금 마시니 화대종주를 하는 분들이 모여들었다. 그 분들은 밤 12시에 화엄사에서 출발했단다. 2분간 쉬고 다시 출발했다. 상승 데크 계단이 처음으로 나온다. 곧 노루목에 이르렀고(4:38AM) 아무 생각없이 앞사람 따라 가다 보니 하마터면 반야봉으로 갈 뻔 했다. 이 때부터 길이 좀 안 좋아진다. 너덜길이 시작되었다. 트레일 러닝이라고 해서 트레일 러닝화를 처음 신어봤는데 신고 온 것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중등산화가 맞는 것이었다. 초원의 트레일을 달리는 것이 아니고 이런 지리산 같은 종주길에 트레일 러닝화는 발목 부상의 위험이 매우 크다. 착지 순간 어떤 이유에서든 불균형이 발생할 때 푹신함은 가해지는 불규칙한 하중을 커버해주지 못하고 꺾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드디어 삼도봉에 도착했다. 4:51분. 임걸령 이 후부터는 속도가 슬슬 빠지기 시작한다. 해발 1500미터로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하동에 걸쳐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바탕으로 지어진 봉우리 이름이기에 오래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으리라. 원래 이름은 이곳의 바위 봉우리가 낫의 날을 닮았다고해서 낫날봉이었다고 한다. 1998년 국립공원공단에서 삼각뿔의 표지석을 세우면서 삼도봉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날이 밝아 오니 삼도봉에서 드디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삼도봉에서 본 반야봉

지나 온 노고단, 반야봉 능선.

불무장등과 목통골 계곡이 아득하다.
삼도봉에서 목을 축이고 사진도 찍으며 8분간 쉬었다.
2. 삼도봉~연하천 대피소
그리고 화개재를 향해 서둘러 내려갔다.
화개재에 5:14분에 도착했고 지도팻말을 들여다 보고 있는 분들을 흘깃 보고 지나쳤다.

토끼봉 헬기장.
토끼봉 헬기장에 도착한 것은 5:39분. 바나나와 빵으로 허기를 채우고 5분 정도 쉬고 다시 출발했다.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왜 이리도 긴 걸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는 힘이 있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조금씩 머리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름의 대간길은 숲이 무성하고 지리산 주능선도 조릿대와 더불어 무성한 숲으로 길을 좁히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의 사광을 받아 반짝이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다 덜컥 이런 돌무더기가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연하천 대피소 가는 길
대피소 1.4km 정도 남기고 나타난 데크 계단인데 참 아득해 보였다.

그래도 이런 아름다운 아침 풍광이 곳곳에 보이면 기분이 좋다.

드디어 연하천 대피소가 수백미터 남았다는 반가운 팻말이 보이고 고귀한 참석자들을 위한 레드 카펫 마냥 고단한 산객을 위하기라도 하는 듯 편안한 데크 카펫길이 나오고 이내 연하천 대피소에 이르렀다. 6시 37분.

연하천 대피소
상향 조정되었던 목표 10시간 10분 완주를 위해 연하천 대피소에 도달해야 하는 시간은 6시 10분었는데 27분이 늦어졌다. 사실 이 당시에는 머리속에 염두해 두었던 목표시간들은 모조리 리셋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장해 둔 목표시간을 꺼내 볼 여력마저 없었다. 그저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 수준이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몇몇 선수분들, 참관인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소진한 물은 500ml 병에 한 모금 남은 정도로 마셨었고 이곳에서 물을 보충했다. 그리고 써모스 커버에 담아온 얼린 파워에이드를 처음 꺼냈는데 슬러시처럼 되어 아주 시원했다. 빵과 체리를 먹고 허기를 채우며 15분을 쉬고 다시 출발했다.
3. 연하천 대피소~벽소령 대피소

연하천 대피소를 떠나며.
연하천 대피소, 배려가 좋은 곳이었다. 식수도 바로 공급이 되고, 도착할 때도 기분 좋은 데크길, 출발하는 길도 데크 카펫길로 배웅을 해 준다. 연하천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구간 거리가 길지 않고 연하천까지 올라섰던만큼 초반 내리막이 있어 나름대로 무난하게 갈 수 있었지만, 오르막에서는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처음으로 중탈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맨 뒤 억불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형제봉 직전 조망바위 앞에서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한 눈에 바라본다. 천왕봉이 아직도 저 멀리 있다.

그런데… 어라? 조망바위에 올라서서 다시 카메라에 눈을 대니 불과 몇 초만에 천왕봉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이 좋은 날씨에! 눈 앞에 벽소령 대피소가 보인다.

주능선의 오른편이 아침햇살의 사광과 역광을 받아 멋스럽다.

형제봉을 지나며(7:34AM)
드디어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8:01AM. 진행요원들의 반가운 환영이 정신적 재충전을 시켜주었다. 이 곳에서 1등 선수가 이미 중산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이 되는가?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벽소령에 온 시간에 이미 중산리에 있다는 것이… ㅎㅎ another level 이다.

벽소령 대피소
여기서 목표 수정을 했다. 10시간 10분 목표를 위해 벽소령에 도착해야 할 시간은 오전 7시 10분이었는데 8시 1분에 도착했으니, 원래대로 12시간 제한시간 완주로 목표를 다시 하향 조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벽소령의 테이블에 앉아 장터목 중탈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에 부쳤다. 더구나 마린이ㅎ님께서 이미 90명 정도가 벽소령을 이미 지났다고 하는 말에 완전 레벨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더욱 지칠테고 속도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12시간 마지노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냐를 따져야 할 때다. 벽소령이면 전체 구간 중 딱 절반에 해당하는 위치인데 벌써 이러고 있으니 걱정이 앞섰다. 벽소령~세석 6.3km를 애초에 140분을 잡았는데 이 구간에서 더 늦어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 본다. 파워에이드는 슬러시보다 약간 더 묽게 되어 여전히 시원했다. 빵과 체리를 조금 먹으며 9분을 쉬고 다시 출발했다.
4. 벽소령 대피소~세석 대피소
벽소령에서 덕평봉에 오르기 전 약 1.4km까지는 참으로 고맙게도 평지로 죽 이어집니다. 마음 같아선 달리고 싶었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쳐서 절대 뛰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걸었다.

벽소령을 떠나며.
8시 55분 선비샘에 도착했다. 최근에 많이 가물지 않았었나? 선비샘에 물이 나왔다. 몇 몇 분들이 물을 뜨고 계신데, 나는 그냥 지나쳤다. 칠선봉을 향해 올라야 하는데 왜 이리 힘이 들던지, 도저히 힘들어서 지속을 못하겠더라. 선비샘을 지나 25분이 지난 지점, 바위에 털썩 걸터 앉았다. 아, 드디어 허벅지가 털리기 시작하는구나. 하지만 12시간내 완주라는 생각에 3분을 쉬고 다시 진군했다. 칠선봉 조망터가 나왔다.

칠선봉에서 본 대간길. 좌측부터 하봉, 중봉, 제석봉, 천왕봉, 연하봉, 삼신봉이 보인다. 지금은 또 천왕봉의 구름이 걷혀 있다.

삼신봉 앞쪽으로 보이는 우측에 솟은 것이 영신봉, 우측 맨 뒤에 빼꼼히 솟은 것이 촛대봉이다. 이 영신봉과 촛대봉 그 사이 세석대피소가 있다. 어흑! 갈길이 멀다.
칠선봉을 지나쳤다. (9:39AM)

칠선봉을 지나며.
영신봉을 넘으면 세석이다. 오르막은 도저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허벅지의 근육통이 느껴졌다. 벽소령소에서 근육이완제와 소염진통제를 한알씩 먹었는데 그것이 효과적인지는 느끼지 못했으며 그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력과 신체의 모든 한계를 넘어선다는 느낌 뿐이었다.

영신봉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대성리쪽이 되는데 바위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낸다.

영신봉을 오르는 계단. 대피소 전에 이런 계단이 계속 있다. 연하천, 벽소령, 세석까지…

계단에 오르니 주능선이 다시 보이는데 어라? 천왕봉이 또 구름에 휩싸이고 있다.(10:02AM)
세석이 이제 코 앞이다.
드디어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10:24AM). 벽소령~세석 구간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털린 구간이다. 그렇다, 털렸다. 기본적으로 몸이 무겁다 보니 오르막이 매우 힘든데 초반에는 기본 체력으로 그것을 커버하지만 체력을 넘어서 지속이 되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시점이 온다. 기나 긴 벽소령~세석의 6.3km에서 선비샘을 지난 중후반부에 이미 체력 소진을 다 해버리고 오르막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나보다 느리게 가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 숨을 고르다 누가 지나가면 뒤쫓아가고, 내리막에서는 마치 중력으로 내려가 듯 힘없이 그저 속도를 커버하기 바빴다.
다만, 운영요원분들의 열렬한 응원과 격려가 부스트를 해주었다.

파워에이드의 얼음은 다 녹았지만 차가웠다. 연하천에서 보충했던 500ml의 물을 세석까지 소진했다. 세석의 식수는 말랐다고 하며 매점에서 물을 사라고 하는데, 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매점까지 이동할 힘이 없어서(완전 털림ㅠ) 장터목까지 저 파워에이드로 버티기로 했다. 베일리스를 탄 커피는 여기서 딱 두 모금을 마셨다. 정말 시원하고 맛도 좋고 다 좋았는데 알콜 성분이 있다 보니 혹시 더 졸릴까봐 더 들이키지 못했다.
세석 대피소에서 12분을 쉬고 10시 36분에 출발했다.
5. 세석 대피소~장터목 대피소
날은 흐려지고 빛이 사라지니 세석평전의 감흥도 반감되었다. 촛대봉을 오르는 돌길이 험준하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은데 작은 오름 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선수번호를 모르는 어떤 여성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장터목까지 진행했었는데 나중에 장터목 이 후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10시 54분에 촛대봉을 지나쳤다.
화장봉의 연하선경 조망터에는 11시 32분 도착해서 목을 축이고 연하선경 감상을 하며 8분간 쉬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불필요한 펜스는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아름다운 조망터에 위험하지도 않은 곳에 펜스…. 오히려 연하선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펜스에 간당간당하게 올라서서 사진을 찍는 분들이 계셨는데, 결국 펜스가 또 다른 위험요소가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였다.

화장봉에서 보는 연하선경,

구름이 엄습해 왔다.
구름이 연하선경을 완전히 덮치기 전에 가까스로 도달을 했다. 이 후로는 카메라를 집어 넣었다. 곰탕으로 변해버린 날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을까? 풍광에 심취하기보다는 이제 시간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세석~장터목 구간은 3.4km. 세석에서 10시 36분에 출발했으니 1시간 10분 정도로만 가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바람일뿐, 다리는 천근만근에 작은 오르막 한계단치도 힘에 겨웠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것은 12시 3분이었다. 산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운영진께서는 열렬한 격려와 캔디도 주시고 또 너무도 고맙게도 미리 공수해 둔 물을 제공해주셨다. 장터목의 식수처는 중산리쪽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와야 하는데 말이다… 세석~장터목 구간에 파워에이드를 다 소진했고 파워에이드 병에 마지막 물을 담아갔다.
12시를 갓 넘긴 시점. 운영진께 여쭤보았다. 이 시점에 12시간내 완주를 할 수 있을까요? 답변은 모르겠다였다. 우문현답이다. 내가 벽소령에 도착한 시점인 8시경 이미 중산리에 도착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저마다 다른 체력을 가졌는데 어떤 답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시점에서 내 생각은 오로지 12시간 완주밖에 없었기 때문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시간 중심적인 생각 뿐이었다. 이 시점에 도착한 사람에게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모르겠다고 한 것은 가능도 하다로 알고 장터목에서는 쉼없이 곧장 가기로 했다. 천왕봉까지 1.7km구간이 최고의 오르막 난이도라 1시간을 목표로 잡았다. 바로 고!
6. 장터목 대피소~천왕봉
장터목에서 바로 된비알로 치고 계속 올라갔다. 팍팍이 아니라 한 걸음 척, 한 걸음 척 이렇게 올라갔다. 허벅지에 힘이 하나도 없고 스틱을 지지하며 겨우 겨우 한 발 한 발 들어 올리는 식이었지만 쉼없이 그렇게 계속 갔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봉크가 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젤이 있었는데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금 초콜렛을 하나 뜯어 입안에 넣었더니 바짝 마른 입천장에 질척하게 떡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 달콤함과 짭조름함을 맛보려고 혀를 위로 올리는데 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고갈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래, 혀도 움직이지 말자. 초콜렛아 그냥 천정에 붙어 있어라.
천왕봉이 1.1km 남았다는 제석봉 팻말에 이르렀을 때, 길게 한숨을 푹 쉬었더니 중산리에서 올라오신 아주머니께서 1km만 가면 천왕봉이니 힘내세요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천왕봉까지 이 분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좀비처럼, 속도 빠른 K좀비가 아닌 워킹데드의 좀비처럼 아무생각없이 신음하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갔을 뿐이었다.
통천문을 12시 41분에 지났고 마지막 가파른 철봉 펜스 구간은 다리 힘이 아닌 팔힘으로 올라갔다. 제석봉에서 그리고 천왕봉 목전에서 사진을 찍어주셨던 운영요원분께 역시 장터목에서의 우문-12시간내 완주가 가능하겠는가?-을 똑같이 드렸다. 똑같은 현답, 사람마다 달라서 모른다였는데 아무도 지금 시점에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여성분이 천왕봉~중산리까지 1시간 20분만에 하산했다는 정보를 주셨는데 여기서 희망이 좀 생겼지만 이미 하산한 분의 체력과 동일 잣대로 보면 안되기에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천왕봉 직전 로한님께서 찍어주신 인증샷으로 천왕봉샷을 대신.
드디어 천왕봉에 12시 57분에 도착했다.

12시 57분에 천왕봉에 도착. 완주시간 때문에 정상석 인물 인증은 포기하고 핸드폰으로 정상석만 재빨리 찍고 곧 바로 하산했다. 어찌 보면 천왕봉의 곰탕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 날씨가 좋아 이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풍광을 담아냈다면 12시간 완주는 실패했을 것이다.
7. 천왕봉~중산리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은 거리는 5.7km. 오르막이라면 이 상태로는 절대 불가능이지만 내리막, 대신에 악명 높은 최악의 너덜길, 천왕봉~로타리대피소~중산리 코스는 또 처음이어서 가능할지가 도무지 가늠이 안되었다. 12시간 완주를 포기한다면 달콤한 휴식과 더불어 여유있게 내려가면 되는데 알고 보니 가능한거였는데 포기한거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쉽게 포기는 못했다. 더구나 집에는 당당하게 기록증을 받아온다고 하고 떠났는데, 간발의 차이로 기록증을 못 받는다면 지금까지 온 고된 여정이 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단 12시간 완주를 목표로 최대한 빨리 내려가보다가 중간쯤에 다시 가늠해보기로 했다. 내리막이니 할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두 번째 발목을 접질리다.
천왕봉의 정상석만 핸드폰으로 찍고 중산리로 곧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내려가는 첫 발, 폐타이어 고무가 덮힌 데크 계단을 몇 발 디디는 순간 힘이 풀린 오른 다리가 아주 살짝 중심을 잃고 흔들렸는데 임걸령 근방에서 접질렸던 것보다 매우 심하게 발목이 꺾이고 말았다. 꺽인데 또 꺾임. 내리막이어서 하중이 더 크게 가해졌고 악하는 비명소리와 나뒹굴고 말았다. 스틱이 흩어지고 발목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주변 분들이 놀라서 쳐다 보는데 창피함이나 실려갈 걱정보다는 물건너간 완주가 머리속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 한 동안 발목을 주무르고 일어서 계단을 내디뎌 보았다. 통증은 있었지만 자력으로 이동할만 했다. 아마도 발목보호대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자력 하산은 불가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데크 계단이 끝난 후 이어지는 기대 이상의 가파른 너덜길은 더욱 좌절스러웠다. 다시 앉아서 양말을 벗고 파스를 붙이고 보호대를 꽉 동여매고 출발했다. 그리고 다시는 너덜길이 있는 곳에서 트레일 러닝화를 신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너덜길. 희망 고문을 하듯 나타나지 않는 남은 여정을 보여주는 이정표. GPS위치상으로 확인해 보면 될 듯 말 듯한 거리만큼이 계속 남아 있었다. 쉬지 말고 계속 가긴 하는데 험준한 너덜길은 빠른 속도를 절대 허용해 주지 않았다. 게다가 발목을 또 접질릴까봐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통에 답답하게 하염없이 내려갈 뿐이었다. 이 무렵부터는 물도 넘기기가 힘들었고, 마지막 남은 에너지젤을 짜 넣어봤더니 구역질이 나서 반도 못 먹고 버렸다.
약 2시 10분 경으로 기억을 하는데 망바위 지점, 이정표에 중산리가 2.4km남았다는 팻말은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희망적이었다. 길이 더 나빠지진 않을테고 2.4km면 가능하겠다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거의 모든 하산하는 사람들을 추월해 가는데 2시 반경쯤이었을까, 종주 초중반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여성 선수분(나중에 하산해서 다시 뵈었는데 번호를 몰라서 닉네임을 모르겠다)이 유일하게 나를 추월해 갔다. 어찌 그리 빠르게 가시던지, 저 분을 열심히 쫓아가면 성공하겠다 싶었는데 얼마 못 가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눈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ㅎㅎ,
2시 50분경 지도를 보니 아주 가까이 다가왔는데 왜 아직도 숲이 울창하고 한참 가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던지…… 그 무렵 국립공원공단 직원분들이 올라오시며 번호표를 단 나를 보고는 5분만 더 가면 3시 이내에 가실 수 있을 거라고 힘내라는 응원을 해주셨다. 확실한 희망은 여기서 생겼고 몇 분 지나니 탁탁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운영진께서 신호를 주시는가 보다. 이내 나타나는 반가운 통천길 관문!

통천길을 지나 아스팔트길을 내디디며 결승점이 300여미터 남았을 때 시계를 보니 2시 55분이다.
아무리 날씨가 변화무쌍한 지리산이라고 하더라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 나를 맞추든지 반달곰이 난데없이 나타나 나를 덮치지만 않는다면 실패할 확률은 zero라는 확신을 가지고 중산리 계곡 다리에서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며 마지막 사진을 찍어 본다. ㅎㅎ
2시간 58분 45초 기록으로 마무리하며
종착지인 중산리탐방안내소의 카운터 문을 지난 시간이 2시 58분 45초! 이렇게 마지막 기록증을 받은 선수가 됐다. 화장봉부터 중산리까지 더디지만 한 번도 쉼없이 걸은 보람이 있었다.
먼저 도착해 쉬고 계신 많은 참석자분들과 운영진분들의 환호와 격려는 지금까지의 고난의 여정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었다. 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해주신 텡그리님 이하 운영진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주능선에서 조우했던 수 많은 회원분들께도 감사드린다.
PS.
1. 안놔푸르나님은 이동버스때부터 회원들께 음료수를 나눠주시고 완주 후 탕구님과 더불어 식당에서 테이블 합석시켜 잘 챙겨주셔서 참 고마웠다. 그 외 언급하지 않은 많은 분들이 계신데 모두들 감사했다.
2. 중산리 하산하면서 다시는 이런 것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하루가 지난 이 순간,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출산의 고통을 잊고 다시 아기를 갖는 사람처럼, 내년에는 어떤 전략을…… 이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3. 접질린 발목은 큰 부상은 아닌 듯 하여 다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복숭아뼈 부위가 살짝 부었는데 관절의 움직임에 어려움이 없고 소염제와 어혈치료제로 대응을 하고 있다. 냉찔짐도 효과적인 듯 하다.
4. 트레일 러닝화는 너덜길에 사용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나의 기준이 됐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발목 인대 강화와 평소의 연습이 중요할텐데, 내가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기에 트런화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다시 기회가 된다면 난 중등산화로 할 예정이다. 살을 1kg내주고 신발에서 1kg를 취한다는 전략!
5. 6월 11일 토요일 저녁 밥을 먹고 집을 나설 때 81kg였는데 6월 13일 월요일 아침, 일어나 몸무게를 재니 78.2kg이다. ㅎㅎㅎ 평소 단련된 분들은 아마도 체중 변화가 크지 않았을텐데 약 3kg이 빠진 것이 몸이 얼마나 혹사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듯 했다. 집에서 한소리 하는데 나는 그냥 좋은 추억으로 담아 둔다. ㅎㅎ.
지리산 성중종주 램블러 경로 기록: http://rblr.co/Oe19g
트레인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네이버 카페 트레인 알피니즘 : https://cafe.naver.com/trainalpinism
국립공원 산방기간 끝나면 지라산, 설악산 종주 곧바로 시작해야겠어요. 종주 뽐뿌가 옵니다. ㅎㅎ 잘 봤습니다.
그러게요 지리산은 4월 30일까지, 설악산은 5월 15일까지 일부 구간 빼고 통제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