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일출

지리산 노고단 일출 산행 (feat. 노부모님과 함께) (2024-11-17 ~ 11-18)

멀어서 자주 가진 못해도 지리산은 한 번 가보면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는 산일 것이다. 규모로 치면 우리나라 최고의 산이니까.

지리산의 주요 봉우리를 생각해보면 천왕봉과 더불어 가장 매력적인 곳은 노고단이 아닐까 한다. 차로 이를 수 있는 성삼재에서의 접근성도 매우 좋고 동쪽으로 뻗은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과 북쪽의 만복대와 고리봉까지 겹겹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의 접점이기도 하다. 노고단의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에서 피어오르는 새벽운해가 구례읍을 뒤덮을 때는 산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순간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런 노고단이 괄시를 당하는 때는 아마도 지리산 종주를 할 때 체력적, 시간적인 saving을 위해서 노고단 고개를 지나며 노고단(1507m)을 한 번 바라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아닐까 한다. 지리산 종주는 아름다운 노고단을 소홀히 하며 지나치도록 하는 아이러니한 산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쁜 종주꾼들이 노고단을 그냥 지나친다면, 살방살방 관광모드로 오는 분들이 오히려 노고단 탐방 경험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과 지리산의 추억이 있는 분들은 바로 노고단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나 생각해본다.

Connecting the dots

이렇게 생각해보니 노고단은 지리산 능선의 접점일 뿐만 아니라 가까운 분들과의 접점이 되는 봉우리가 아닐까 한다. Connecting the dots다.

8년 전인 2016년 여름 달궁야영장에서 가족캠핑을 했을 때 혼자서 이른 새벽에 노고단을 다녀오겠다고 하자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 아들이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정말로 새벽같이 일어나 아내와 둘째는 자는 와중에 둘만 노고단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큰 아들에게 이 때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종종 노고단 얘기를 하곤 한다. 당시 이른 아침의 노고단 경치는 너무나 멋졌을 뿐만 아니라 ‘아빠랑 둘이만 갔었다’라는 사실이 가장 뿌듯한 기억이라는 것이었다. 몇 년간 큰 아들이 동생에게 노고단에 다녀왔다는 자랑을 하자 둘째도 노고단에 데려다 달라고 얘기하곤 했었고 어쩌다 보니 그로부터 5년뒤인 2021년 여름에 온가족이 노고단에 다녀 왔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노고단이었고, 그 때 첫째가 동생에게 한 말은, ‘나는 아빠랑 둘이만 왔었다’. 내심 이 말이 저도 듣기 좋았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자주 다니셨던 산. 얼마전 부모님과 지리산 종주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 보았을 때 옛 노고단 고개 사진을 보고 더 연로하시기 전에 함께 노고단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노고단이라면 부모님께서 종종 소일거리로 텃밭에 작물을 손보러 야산에 가는 정도의 난이도 정도라서 걱정도 별로 되지 않았다. 마침 소진해야 할 회사 휴가가 남아 있어서 몇주전에 11월 17일 일요일자 노고단 대피소를 예약을 했다. 1박을 하는 만큼 일출 구경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일~월요일 일정이다보니 형제들은 참석을 못하고 나와 부모님 이렇게 셋만 다녀오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진첩속 지리산, 부모님과 내가 가진 각각의 노고단 추억, 노고단의 애착, 휴가, 대피소 1박, 일출……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추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선을 잇는 계획이 세워지고 실천이 되었다.

예보를 보니 내내 푹했던 날씨가 하필 17일 일요일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고 18일에는 더 떨어졌다. 노고단 대피소는 분명히 더울 것 같은데 혹시 몰라 침낭 3개, 매트 3개를 챙겼다. 부모님께 겨울옷을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아버지는 약간 느슨한 생각을 하실 듯 해서 경량 패딩을 별도로 챙겼다. 핫팩도 챙기고 먹을 것도 죄다 챙기다 보니 55리터 배낭이 가득 찼다.

성삼재 ~ 노고단대피소

11월 17일 흐린 날씨탓에 우중충한 느낌이 들었지만 성삼재에서 끊임없이 내려오는 차량들과 반대로 홀로 거슬러 올라가는 맛이 좋았다. 성삼재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찬바람에 아주 쌀쌀했다. 아버지께서 ‘어? 춥네!’ 하시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세가 있으신만큼(올해 87) 야위어서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신체의 기능이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찬바람이 부는 시즌에 몸소 느끼고 계신 거였다. 챙겨온 패딩을 입혀드리고 스포츠 마스크를 씌워드리니 추위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고…ㅎㅎ 스틱을 드렸는데 불편하다고 싫다고 하셨다. 바람에 휘청거림이 감지되어 다시 1개만 쥐어 드렸는데 그냥 들고만 가셨다. ㅠ 반면 어머니는 정말 단단하게 준비해 오셨다.

성삼재 출발점에서
3시 47분. 성삼재 출발점에서.
노고단 산행
아버지에게 패딩과 마스크의 위력은 컸다.
노고단 일출 산행
어머니는 한참을 앞서가고 나는 아버지 뒤를 봐드리며 가는 형국이다.
노고단 일출 산행
아버지가 너무 느리다고 기다리며 타박하시는 어머니.
노고단 일출 산행

어머니는 걱정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돌계단에서 힘겨워 하셨다. 바로 뒤에서 봐드려야 했다. 날씨가 추운 것이 가장 큰 복병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아버지께서 힘들어 하셨다.

노고단 일출 산행

노고단대피소

노고단대피소
오후 4시 37분,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성삼재에서 50분 정도 걸렸다.

기온은 1도, 바람은 좀 불고 있고 습도는 28% 정도로 아마도 다음날 아침 운해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 싶었다. 대신 맑은 하늘에 일출은 기대가 되긴 했다.

노고단 대피소의 일몰

저녁을 먹고 6시가 넘은 시간에 잠시 밖에 나와 보니 언제 짙은 구름이 있었느냐는 듯이 구름이 걷히고 있었고 선명한 붉은 노을이 내일 아침을 한껏 기대케 만들었다.

노고단대피소 일몰

노고단대피소 일몰

다음날 새벽 5시가 넘어 나설 채비를 하는데 아버지는 이미 깨어 있으셨다. 윗층에서 자고 있던 어린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떠들고 바닥을 긁는(?) 통에 한숨도 못주무셨다고…ㅠ

노고단 대피소 – 노고단

6시가 조금 넘어 나섰다. 아침 기온을 보니 영하 5도다. 모든 것을 잘 챙겨 왔는데 랜턴을 깜박 잊고 안가져왔다 ㅠㅠ. 전날 대피소 직원께 사정을 말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없다고 한다. 휴대폰 불빛으로 몇 걸음 옮겼는데 그나마 달빛이 밝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이어 올라오던 부부가 지나치다 여자분께서 상황을 인지하고 뒤돌아오시더니 뒤에서 랜턴빛을 비춰주셨다. 그 마음씨가 너무나 감사했다. 노고단 고개에 이르렀을 때 바람은 매우 거셌다. 노고단탐방지원센터에 예약된 정보를 태그하고 입장하면 되는데 직원이 일출 시간이 있으니 조금 기다렸다 가라고 권했다. 바람이 거세서 지금 올라가면 1분도 못버틸거라고 하면서 겁을 주었다. 실제로 바람이 거세서(5m/s 이상) 체감온도는 영하 10도~12도 정도로 추정되었다. 어머니는 전혀 춥다고 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좀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약 15분 정도를 더 기다린 다음에 올라갔다.

노고단 일출

거센 바람에 아버지가 휘청휘청거려서 손을 잡고 갔다. 어머니는 날아갈 것 같다고 하셨다.
데크 전망대에 이르렀을 때 동녘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비단결에 모두들 감탄사를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야~’라는 소리를 지르셨다. 주홍빛 물감이 광활하게 번진 듯 했다. 빤히 보고 있자니 번져지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고 황홀경이었다.

노고단 일출

노고단 일출

당연하겠지만 이 시기에는 천왕봉보다 많이 남쪽으로 이동해 뜬다.

노고단 일출

지리산 노고단 일출

노고단 일출

30분간을 버틴 뒤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광각렌즈라 아쉽긴 했지만 황금빛 구슬이 말을 잊게 했다. 바람이 거세서 출입금지 안내판 앞에서 바람을 피하며 떠오르는 태양을 빼꼼히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귀여웠다.

부모님과 함께 한 노고단 일출 산행
노고단에서의 추억 포인트 하나를 찍는다.
노고단 정상석에서

몇십년만에 변치 않는 늙은 할미(老故)를 찾아 오신 두 분. 어머니는 감격스러워하셨다. 남은 생(올해 80)에 지리산을 다시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노고단 일출
노고단 일출
노고단 일출 산행
화엄사 계곡 뒤로 구례, 구례를 관통하는 섬진강이 보인다. 섬진강 자전거길 라이딩을 할 때는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보았던 생각이 난다. 과거의 점들이 연결된다.
노고단 일출 산행
붉은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오르는 것을 뒤로 하고 빠르게 하산.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좀 더 있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움은 없다.

노고단 고개 : 1987년 VS 2024년

노고단 일출 산행

다시 노고단 고개에서 사진 한장. 부모님께는 수십년의 시간 층위를 갖고 있는 노고단 고개가 아닐 수 없다. 1987년의 노고단 고개, 2024년의 노고단 고개.

노고단 고개에서.
노고단 고개에서 부모님 – 2024년
1987년 노고단 고개
노고단 고개에서 부모님 – 1987년
노고단대피소
노고단대피소 취식장에서. 해가 좋을 때 저녁에 서쪽창으로 비추는 햇살, 아침에 동쪽창으로 비추는 햇살이 아름다운 곳이다.
노고단 할미와
노고단 할미와…

이제 하산합니다.

노고단 일출 산행

노고단 일출 산행

노고단 일출 산행
등을 비추는 해를 다시 한 번 보면서…
노고단 일출 산행

노고단 일출 산행

성삼재에 와서 따뜻한 커피를 들고 차안에 앉아 돌아갈 채비를 하며 혹독했던 새벽 날씨와 일출을 내내 곱씹었다. 차안에 앉아서야 다시금 안도가 되면서 모두들 웃음을 지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부모님과의 노고단 일출 산행, 성공적! ^^

오늘 아침에 아버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면 즐겨 쓰시는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어 노고단에서의 감동을 공유해 주셨다.

한시 : 老姑壇 日出(노고단 일출)

般若偉容夢裡安(반야위용몽리안)
반야봉의 웅대한 모습은 꿈속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지고
皎皎月色意氣蔓(교교월색의기만)
밝은 달빛은 바른 의지와 정기를 퍼뜨린다네
西山斜陽頭流雄(서산사양두류웅)
서산에 비치는 석양은 두류의 산세가 웅장함을 드러내고
老姑日出方丈寬(노고일출방장관)
노고단의 장엄한 해돋이는 방장의 광활함을 느끼게 한다네

疊雲峻路時時冷(첩운준로시시랭)
산길 위 겹쳐진 구름은 자주 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積鬱我心步步歡(적울아심보보환)
답답했던 내 마음은 발걸음마다 기쁨으로 채워지네
連立衆峯陽光好(연립중봉양광호)
펼쳐진 산 능선들에는 따스한 햇볕이 좋구요
培養浩氣守道完(배양호기수도완)
호연지기를 기르니 정도를 지키는 자세가 완벽하다네

( * 주 : 두류, 방장은 지리산의 별칭이라고)

2024-11-17~11-18

다음을 기약하며…

트레인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네이버 카페 트레인 알피니즘 : https://cafe.naver.com/trainalp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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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리

와 인터넷 검색하다가 들렀는데 사진이 너무 멋있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트레인TRAIN

감사합니다^^

유니유니

와~ 왠지 모르게 뭉클해 지네요. 좋은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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