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르 드 몽블랑(TMB) 가족 트레킹(4) – 본옴므 고개, 푸르 고개 착시, 캠핑
거대한 우측의 페나즈봉과 좌측의 벨라발봉 능선 사이로 남서 방향으로 올라 본옴므 고개에 이른 우리 가족. 본옴므 고개까지 이르니 그동안 힘겨운 트레킹을 일단락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마치 정상에라도 도착한 듯이 이제 내려가면 되느냐고 묻고 있었다.
올라온 방향 즉 남서쪽으로 계속 가면 내려가게 된다. TMB 루트로 가기 위해서는 진행 방향 기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푸르북봉(Tête Nord des Fours), 벨라발봉(Têtes des Bellaval) 능선의 중턱을 가로질러 본옴므 십자가의 고개(꼴 드 라 크로와 뒤 본옴므 Col de la Croix du Bonhomme)로 가야 한다.
(이전 이야기 : 퐁테 캠핑장에서 본옴므 고개까지 트레킹 여정 – 아래 링크)
본옴므 고개를 지나


본옴므 고개까지가 체력 소진의 절정이었던 것 같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본옴므 고개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의 중턱을 통해 크로와 뒤 본옴므 고개까지 약 1.7km 를 더 가며 고도는 약 150m 정도 더 높이게 되는데 이 구간을 지나면서 아내는 이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 것 같았다. 선두조인 둘째와 나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이 날 트레일 러닝 대회가 있었나 보다. 진행 방향 반대편에서 러너들이 배번을 달고 끊임없이 본옴므 고개에서 주최자들과 컨택 후 남서쪽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남서쪽 아래로는 아래 사진과 같은 초원 길이 쭉 펼쳐진다. 좌로는 우리가 걷는 능선 중턱, 우로는 페나즈봉에서 이어진 라 뿐트 데 또바쎄(La Pointe des Thovassets)가 버티고 있는 곳이다. 좌측은 기테 능선(Crete des Gittes)으로 이어진다. 정면에는 호슈 메흘르(Roches Merles)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오후 4시 19분. 본옴므 고개에서 약 30분간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본옴므 고개에서 본옴므 산장으로 향하는 이 길(아래 그림에서 파란색 라인)은 다음과 같은 지맥의 중턱이다.
몽똥듀, 벨라발봉, 북푸르봉으로 이어진 남서 능선이 갈라지는데 하나는 서쪽의 본옴므 고개로 이어지고, 또 남동쪽으로 푸르 고개(Col des Fours)를 지나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중턱의 아래로는 호슈 메흘르 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기테 능선, 우측으로 지따즈 호수와 Roselend 호수, 그리고 겹겹이 쌓인 장쾌한 알프스 산들이 보인다. 중턱의 위로는 거대한 몽블랑 산군에서 뻗어 나온 능선의 종착역이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중턱길의 조망은 탁 틔여 있어 내내 좋으며 짧게 짧게 오르 내리는 길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남은 거리와 시간을 가늠하지 못했던 후미조인 아내와 첫째가 육체적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고단해했다. GPS앱으로 진행 상황을 보며 가던 나와 둘째와 달리 뒤쳐져 오던 아내 입장에서는 가도 가도 끝이 안보이는 듯한 길을 걷는 듯 했다고 한다.



둘째와 함께 개울을 건너 우측의 고지에 올라서서 후미조를 기다렸다. 15분 쯤 기다렸을까? 저 멀리 후미조가 보인다.

이 개울은 오트사부아주(Haute-Savoie)와 사부아(Savoie)주의 경계다. 개울을 건너면 오트사부아에서 사부아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이 개울을 건너고 나서 올라온 뒤에 바위에 그야말로 털썩 주저 앉았다. 아내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같았고 마지막에 바위 경사에서 거센 물살의 개울을 건널 때는 겁이 나기도 했다고 했다. 멘탈이 털린 듯 했다. 앞으로 갈 길이 조금 더 남았다는 사실을 건네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8일간 계획한 TMB여정이 수정되어야 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오후 6시가 다 되었는데도 한낮 같았다. 오후 6시 7분. 200여미터 정도 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Col de la Croix du Bonhomme(본옴므 십자가 고개)다. 남쪽 아래로 본옴므 산장이 보인다. 좌측 북동쪽으로 오르면 바로 푸르 고개(Col des Fours 2663m)로 넘어가는 길이다. 본옴므 산장이나 그 아래 레사피유 마을로 이동할 계획이 없던 우리 가족이 가야할 길이 바로 푸르 고개길이다.



TMB의 정규 루트는 여기서 본옴므 산장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 레샤피유(Les Chapieux) 마을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동북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모테산장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TMB 변형코스로 본옴므 산장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 푸르 고개를 넘어서 가는 길이 있다. 2663m의 푸르 고개를 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지의 조망이 아주 멋진데 나는 이 길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이 갈림길에서 잠시 쉬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오르막이 남았다고 얘길 하니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다.
많이 지쳤기 때문에 내가 본옴므 산장에 가서 음료와 먹을 것을 좀 사오기로 했다. 본옴므 산장은 산장 이용객외에는 저녁식사를 안해준다는 얘기가 있어서 좀 걱정스러웠지만 음료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갈림길 돌탑에 배낭을 내려 놓고 혼자서 본옴므 산장으로 내려 갔다.

본옴므 산장(Refuge de la Croix du Bonhomme)
오후 6시 20분. 10분 정도 내려가 본옴므 산장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식당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6시에서 6시 30분까지 break time이다. 식사 주문은 물론 작은 스낵이나 음료 주문도 받지 않는다. 10분 정도 기다리고 6시 30분이 되어서야 직원이 카운터 앞에 서서 주문을 받는데, 먼저 산장 손님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니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산장 손님들의 주문을 받은 다음에 주문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ㅎㅎㅎ. 아니 나는 그저 냉장고 안에 있는 음료수 4병만 사가지고 가면 되는데…
듣던 대로였다. 하필 도착한 시간도 식사 시간으로 붐빌 때였다. 그냥 발길을 돌렸다. 다시 갈림길에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아내가 어쩔 수 없다며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자고 말했다. 내가 본옴므 산장에 다녀온 30여분간 쉬면서 기운을 차렸나 보다. ㅎㅎ. 산장에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 나는 쉴틈이 없이 배낭을 꾸려 맬 수 밖에 없었다.

오후 6시 44분. 갈림길에서 푸르 고개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쪽으로 가는 사람은 몇 분 전에 출발한 한팀이 전부였고 우리 가족 밖에 없었다. 대부분 본옴므 산장쪽, 레샤피유 마을쪽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이었다. 해는 여전히 쨍쨍하고 오르막을 계속 올라야 했다. 이정표 상으로는 푸르 고개까지 30분이니 우리 가족의 속도로 치면 1시간은 잡아야 한다. 1시간동안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리적으로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아내는 계속 아직 멀었냐고 묻는데 나는 그저 푸르 고개만 넘으면 된다고 말했다. 여보, 나도 여기에 생전 처음 온 곳이라구! ㅋㅋㅋ



오후 7시 20분. 갑자기 빙하길이 시작되었다. 발자국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데 완만한 경사지다 보니 살짝 미끌거리면서 오르는 이 길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길었다. 아내는 이런 길이 있냐며 당황해했다. 저 멀리 고개 마루에 앞서 간 2명의 트레커들이 보였다.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긴 빙하길을 통과해 바위군이 나오는 곳에서 잠시 걸터 앉아 쉬었다.
푸르 고개에서의 착시
바위군을 벗어나 다시 눈밭을 보니 발자국이 불분명하다. GPS로 확인해 보면 확실히 경로에 서 있다. 바위군을 따라 이동하고 바위 자락이 끝났을 무렵 다시 눈밭이 나오고 분명 푸르 고개에 이르렀음을 확신했는데 발자국이 어디에도 없다. 분명 있을 터인데 넓은 지대에 흩어진 흔적들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길이 안 보인다. 게다가 아내와 아이들은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당혹스러웠다.

머리속에 담아 놓은 루트로는 푸르 고개에 이르면 마치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듯이 90 방향으로 우측으로 꺾어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분명 푸르 고개에 서 있다. 진행 방향 기준 오른쪽을 보았다. 커다란 봉우리(아래 사진)가 떡하니 서 있는데… 나는 이걸 넘어야 한다고 순간 생각했다. 사방팔방 어느곳에도 길의 흔적이 없고 봉우리로 향하는 능선에 희미하게 길처럼 보이는 흔적이 보였고, 무엇보다 푸르고개에서 딱 진행방향의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영락없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GPS앱으로 방향을 확인해 봐도 틀림없었다. 사실 이건 나의 착각이었는데, 실제로는 이 봉우리를 우측에 끼고 봉우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머리속에 지도를 담아 왔지만 위치와 방향만 담았을 뿐, 고도 정보까지 자세히 인지하 않다보니 이런 곳에서 이런 착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GPS앱상으로는 이 봉우리의 방향이 미미하게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보였지만 이 때는 단순히 GPS오차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푸르 고개가 이 날 오른 최고 고도라고 생각했는데 저만큼을 더 올라서 넘어야 한다고? 와일드 캠핑을 하기에는 너무 지대가 높고 사방팔방 눈이어서 최대한 하산을 해서 고도를 낮춰야 하는데 저 봉우리를 넘으려면 우리 가족의 트레킹 속도로는 1시간은 더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보다는 모두들 지쳐 있었다는 점이다.
차마 이런 나의 판단을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푸르 고개가 최고점이고 이 후로는 하산길일 맞는 거 같은데 눈밭에 발자국은 안보이고 오른쪽 봉우리로 향하는 능선에 희미한 길흔적만 보일 뿐이니, 철썩같이 이 잘못된 판단을 계속해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GPS앱을 켜고 진행해 온 방향대로 즉, 북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경로에서 벗어난다. 다시 되돌아 와서 고도표시가 있는 지도앱을 켜고 살펴보았다. TMB 푸르 고개 변형 코스상에서 최고 고도는 역시 푸르고개가 맞다. 그러면 저 봉우리를 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방향은 동남쪽이어야 하고 푸르남봉을 우측에 끼고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다.

푸르남봉을 정면으로 보고 좌측으로 걸음을 옮기니 돌바닥 위에 트레킹 경로 표시인 페인트 마킹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금방 경로를 찾아내긴 했지만 이러한 나의 모습에 아내는 불안감을 느끼는 듯 했다. 첫째는 농담인지 몰라도 힘들다며 눈위에 텐트를 치고 오늘 여정을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니 아내는 속도를 낼 수 있다며 최대한 빨리 어두워질때까지 내려가자고 했다. 원래는 푸르 고개에서 북푸르봉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계획이었는데, 이 늦은 시간에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체력도 거의 바닥이다.

어느 정도 돌바닥길로 내려갈 줄 알았더니 이내 다시 빙하길로 내려서야 한다. 오를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내리막 눈길이다 보니 상당히 미끄러웠다. 넓은 공간임에도 발자국으로 다져진 곳은 한 곳 뿐이니 선답자들의 흔적 그대로 따라갔다.

눈길에 조심조심 내려갔지만 모두들 두어번씩 엉덩방아를 찧었다. 빙하길이 끝난 듯 했지만 다시 금새 다시 나왔다. 꽤 긴 눈길 하산길이 부담스러웠다. 아내는 명백히 눈발자국이 난 이 길을 걸으면서도 연신 이 길이 맞냐고 물었다. 불안한 마음이 컸나 보다.


푸르 고개를 넘으며 든 생각은 본옴므 산장 삼거리에서 레샤피유 마을로 하산하지 않고 이쪽으로 왔다는 것을 잘했다는 것이다. 힘들었지만 북동쪽의 몽블랑 대산괴를 감상하면서 내려가는 맛이 좋았다. 하산길 앞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능선의 좌측에 솟은 봉우리(아래 사진 참조)는 푸앵트 르쇼(Pointe Léchaud 해발 3128m)인데 북쪽으로, 즉 내가 보는 앞쪽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이 바로 세뉴 고개(Col de la Seigne 해발 2516m)에 연결이 되는 것이다. 세뉴 고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가르는 고개다. 우리가 내일 넘어야 할 고개다(실제론 오전의 폭우로 세뉴 고개를 넘는 것은 포기했다).






아내는 눈길을 벗어나자 그제서야 좀 안도를 하는 듯 했다. 첫째는 빨리 텐트를 피칭하자고 아우성이었지만 땅은 축축한데다 평평한 곳이 없었고 무엇보다 여전히 고도가 높아서 새벽에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최대한 내려가야 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걷기로 했다. 밤 9시가 넘도록 날이 밝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저 아래 멀리 내려가는 2명의 트레커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마 우리보다 앞서 푸르 고개를 넘었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 거렸는데 아마도 어두워지기 전에 글라시에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무리일테고 마을에는 숙박시설도 없으니 적당한 야영지를 찾는 것으로 추측했다.


와일드 캠핑
오후 9시 11분. 드디어 적당한 곳을 찾아 텐트를 피칭했다. 해발고도 2270m. 다음날 예보상으로는 점심 즈음 비소식이 있었지만 혹시 이른 아침에 비올 것에 대비해 물이 고이지 않도록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피칭을 했다. 주변은 거대한 산맥이 주변을 둘러 싸는 듯 포근한 느낌의 장소여서 고지대지만 바람의 영향도 커보이지 않았다. 텐트를 피칭하고 짐정리를 하고 나니 오후 9시 25분쯤 되었는데 아직도 날이 밝아 있었다. 기온은 11도로 떨어졌다.


모두들 지쳤다. 허기졌지만 어떤 음식도 준비해서 꺼내 먹을 의지가 없을만큼 귀찮았다. 아이들은 금새 곯아떨어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바람소리가 커지면서 하늘을 보니 언제 맑았냐는 듯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트레킹 기록
총 이동거리 : 14.5km (퐁테캠핑장 – 푸르 고개 – 와일드 캠핑)
총 소요시간 : 12시간 53분
이동시간 : 8시간 13분
휴식시간 : 4시간 39분
획득고도 : 1448m
2024년 7월 20일(토) 맑음.
램블러 기록 : http://rblr.co/orILn


유튜브 영상
(계속)
트레인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네이버 카페 트레인 알피니즘 : https://cafe.naver.com/trainalpini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