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1일(일) – 뚜르 드 몽블랑 가족 트레킹 3일차, 천둥, 번개, 폭우속 백패킹과 모테산장까지.
(이전 이야기 : 본옴므 고개, 푸르 고개에서의 착시, 캠핑 – 아래 링크)
천둥, 번개치는 새벽
얼마나 잤을까? 후두둑 소리에 눈이 떠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새벽 3시 46분. 그러더니 이내 텐트가 번쩍 번쩍 한다. 번개! 그리고 몇 초 뒤 우르릉 쾅쾅! 천둥! 어제밤까지만 해도 쾌청한 날씨였는데…

천둥 번개가 치는 해발 2270m 알프스 고지의 새벽녘
천둥소리는 전날 돌무덤길 즈음에 벨라봉 인근에서 목격한 산사태에서 발생했던 소리와 유사했다. 아내도 깼다. 아이들은 깨지 않고 계속 곤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다 천둥소리에 깼다고 한다. 첫째는 무서워서 그냥 계속 잠을 청했고 둘째는 전날 산사태를 멀리서 목격했던 그 현장의 소리와 천둥소리가 너무 유사해서 산사태가 또 일어난 줄 알았다고 말했다.
텐트 전실의 기온은 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알프스 몽블랑 대산괴 중턱 해발 2270m에서 와일드 캠핑을 하며 천둥, 번개, 폭우속에 놓여 있었다. 텐트위로 세차게 떨어지는 빗물소리는 인플루언서들의 흔히 언급하는 ‘감성’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푸르 고개를 넘으며 멘탈이 나갔던 아내는 내가 추진하지 않았으면 평생 겪어보지 못할 알프스 고산 중턱에서 천둥, 번개속에 놓여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무서워했다. 아이들 역시 천둥 소리에 잠에서 깨어 제각각의 공포심을 가지고 웅크리고 애써 다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나는 혹시나 텐트 전실에 빗물이 넘쳐흐를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모든 짐들이 있는 전실이 젖으면… 생각하기도 싫다.
이너텐트를 열고 텐트 가장자리를 살펴보니 물난리를 겪을 일은 예상되지 않았다. 전날 밤 텐트 피칭을 할 때 가급적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을 골랐고, 고산지에서 단련된 단단하고 질긴 풀들이 무성한 곳이다 보니 빗물이 고이는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안심이 되었다. 반면 아내는 계속되는 천둥, 번개에 불안해했다. 이 정도 날씨는 커버가 되는 장비들을 갖추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나 천둥소리가 날 때마다 나도 내심 불안해지는 마음을 떨굴 수는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천둥, 번개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듯 했으나 곧이어 다시 천둥, 번개가 몰려 왔다. 동이 트도록 잠을 잘 수 없었고 어느 정도 비가 잦아들어서 밖에 나가보았다. 날이 밝아 오면서 비는 그쳤고 하늘을 보니 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는 게 보였다. 어제까지 확인했던 예보는 오늘 오후에 비소식이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새벽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호우가 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비에 젖은 주변과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신선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었고 말 그대로 싱그러웠다.

구름에 휩싸인 세뉴고개와 여명의 빛
오전 5시 37분. 북동쪽의 에귀 데 글라시에에서 뻗어 내려가 이어진 세뉴 고개(Col de la Seigne 2516m)에 걸터 앉은 진한 흰구름층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 뒤로 구름 가득한 가운데 뚫린 하늘에 여명의 빛이 노랗게 보였다.

금방 날이 갤 것 같았는데 다시 우리 텐트 뒤를 감싸고 있는 서쪽, 남쪽 하늘은 다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비가 한차례 더 올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을 깨워 서둘러 나서자고 했다. 비가 와서 텐트안에 갇히게 된다면 지체되는 시간, 남은 경로, 여정 등이 꼬이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남은 컵라면을 먹이고 텐트안의 짐을 서둘러 정리했다. 이 믿을 수 없는 깊은 알프스 산속에서의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을 얘기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침이 되니 모두들 표정이 밝았다.


빗속의 하산
오전 7시경이 되자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텐트를 철수하기 전에 폭우로 돌변했다. 각자 배낭을 꾸리고 맨 다음 그 위에 우비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젖은 텐트를 패커블 디팩에 쑤셔 넣고 내 배낭에 넣어 들쳐 매니 그 무게가 상당했다. 결로를 머금은 텐트가 0.5kg 무게 증가 효과가 있다면 빗속에서 걷은 텐트는 최소 1kg은 증가시키지 않았을까?

오늘은 고난의 행군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7시 24분(7도). 우의를 입고 하산을 하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야영했던 바로 아래 지대에 다른 2명의 트레커가 텐트를 걷고 있었다. 어제 저녁 이 후 푸르 고개 하산길에서 멀리서나마 보았던 앞서 가던 바로 그 트레커들이었다. 나는 이 깊은 알프스 산중에 밤새 우리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말했는데 아내는 너무 인상적이지만 무서웠다고 말했었다. 그런 와중에 천둥 번개가 치는 새벽에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이 인근에서 같이 있었다는 사실에 뒤늦은 안도가 된다고 다시 말했다. 환경이 달라진 건 없는데 마음이 안정되는 그 느낌은 다른가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큰 부분인 것 같다. 그들과 손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계속 내려갔다.
구름이 걷히고 피어나는 하늘
이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그쳤다. 우의는 통기성이 안좋아서 이걸 입고 산행을 지속하면 땀으로 흠뻑 적시기 십상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30여분 정도 내려오니 푸른 목초지에 마치 조각칼로 파놓은 듯한 계곡이 등장했다. 산 위 빙하로부터 곳곳에 물줄기(튀프Tufs 개울이라고 명명이 되어 있는데, Tufs는 응회암을 의미한다.)가 뻗어 내리고 있었는데 이곳이 메인 스트림이 되는 계곡로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지름길 표시가 있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었는데, 처음엔 괜찮더니 갈수록 풀이 무성하고 질척해지더니 어느 순간 밟지 않고는 지나지 못할 정도의 소똥이 가득한 길로 돌변해버렸다. 아내와 아이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ㅋㅋㅋ. 아내는 이 길이 맞냐, 왜 이런길로 오느냐 씩씩댔고 아이들은 왜 우리는 알프스에 올 때 마다 똥밭을 가야 하느냐고 아우성이다. 낸들 아나? 나도 여기가 처음인데 ㅎㅎㅎ.
2022년 우리 가족은 돌로미티 알페디시우시의 에델바이스 산장(Edlweiß Hütte)까지 트레킹 당시 뜻하지 않은 똥물을 피해 줄행랑을 친 적이 있었다. 에델바이스 산장에서 콤파취(Compatsch) 곤돌라까지 내려올 때 드넓은 초원을 밟아 보겠다고 초원을 가로질러 갔다(아래 사진). 한참을 뭉게구름 가득 피어 있는 낭만적인 초원을 거닐다 보니 갑자기 뒤에서 거대한 트랙터 같은 것이 나타났다. 트랙터가 왜 길도 없는 초원을 굴러다니나 봤더니… 갑자기 트랙터에 장착된 어떤 분사구같은 곳에서 무엇을 마구 뿜어대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똥물이었던 것이다. 똥물을 뿌려대며 종횡하는 트랙터를 피해 부리나케 도망을 갔다. 한참을 도망쳐서 다시 길위에 섰을 때 우리 가족은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너무도 어이없는 급박한 상황에 누구의 지시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고 난 뒤 긴장이 풀리며 웃음만 쏟아졌던 게다. 이 일은 돌로미티 여행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던 에피소드인데 지금 이 순간이 그 당시의 데자뷰같이 느껴졌다.
아마도 고지에서는 하수시설이 없어 산장에서 배출되는 것들을 일부 초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다시 드리워지는 구름


글라시에 마을

어제부터 웬종일 힘들게 걷기만 하다 지친 첫째의 탄식이 웃음이 절로 나게 했다. 마을이 나온다더니 매점 하나 없는 농가가 몇 채 있을 뿐인 그런 곳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 절망의 탄식 소리가 너무 웃겼다.

레샤피유 마을을 오가는 미니 버스에서 트레커들이 내리고 모테 산장쪽, 세뉴 고개쪽으로 향했다. 우리도 마을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출발.


다시 휘몰아치는 천둥, 번개와 폭우
글라시에 마을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 천둥, 번개가 친다. 우리는 다시 우의를 꺼내 입었다. 아침보다 더 거세게 내리는 듯 했다. 게다가 바람이 거셌다. 우의를 입어도 바람 때문에 아랫도리는 거의 다 적실 수 밖에 없었다.
모테 산장에 도착
오전 10시 10분. 모테 산장에 도착했다. 세뉴 고개로 오르려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산장 식당 앞 처마에 모여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답답했다. 비는 오고, 갈 길은 먼데… 아내와 아이들은 이렇게 젖은 상태로, 또 비를 맞으면서는 도저히 고개를 넘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세뉴 고개를 넘어 리블랑쉬 계곡, 엘리자베타 산장, 콤발 삼거리에서 몬테 파브르 중턱을 올라 발베니 계곡의 캠핑장까지 가야했다. 그 거리가 여기서부터 21km나 된다. 푸르 고개 아래 중턱에서 아침 7시 24분에 출발해 모테 산장에 이르기까지 5km 남짓 2시간 45분씩이나 걸렸으니, 애초의 계획은 불가능이었다.

기온은 13도에 비바람이 부니 춥게 느껴졌다. 우리는 일단 산장 식당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로 했다. 식당 밖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비를 피하느라 몰려들고 있어서 번잡했는데 식당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다. 시간상 식사 시간이 아니었고 트레커들은 이른 아침에 출발하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산장은 정해진 시간에만 식사가 가능하기도 했는데 모테 산장은 다행히도 식사 주문이 가능했다. 식당에 배낭, 스틱 등의 장비는 갖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내가 문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핫초코, 오믈렛, 블루베리 크레페, 맥주 등을 시켰다. 핫초코는 싸늘한 몸을 녹이는데 그만이었다.


아늑한 산장에서 음식을 먹으며 몸을 녹이니 이 보다 좋을 수 없었다. 창밖에 내리는 비도 더 이상 혹독한 것이 아닌 낭만이 되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할지였다. 남은 TMB 여정을 감안해 이동을 해야 하는데 이 산속의 산장까지 와서 세뉴 고개를 넘지 않고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산장에서 하루 머무르자고 했지만 모테 산장에서 숙박을 하더라도(예약하지 않아서 자리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계획된 일정이 밀리게 되어 녹록치 않았다. 남은 여정 중에서 비용 지불을 하고 숙소를 예약한 곳은 스위스 라풀리(La Fouly)의 캠핑장뿐이어서 일정을 변경해도 부담이 크진 않았지만, 최대한 우리의 여정에 맞추는 동선을 고려해야 했다. 그렇다고 레우슈나 샤모니로 돌아가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우리가 산길을 넘어 왔는데 다시 돌아가려면 버스나 차를 이용해서 먼 길을 돌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탈리아의 꾸르마예르까지 가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원래 오늘 저녁에 발베니의 캠핑장에 도착했어야 했고 내일 꾸르마예르를 거치는 계획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꾸르마예르는 TMB 루트에서 샤모니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샤모니와 몽블랑 아래에 뚫린 터널을 이용해 차로 왕래할 수 있는 이탈리아 마을이다.
산장 직원에게 이곳에서 차로 꾸르마예르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혹시 있는지 물었다. 예상 외로 있었다. 택시를 불러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무려 택시가 산장 앞까지 온다는 것이다. 대신 4명 이동하는데 250유로 현금이란다. 환전한 환율로 치면 무려 37만 5천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산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 12시까지 택시가 도착하는 것으로 택시 예약을 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처지의 트레커들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직원이 오더니 추가로 3명 더 합승해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대신 인당 50유로로 해서 200유로로 깎아준단다. 흔쾌히 수락을 했다. 7명을 태운다니 택시가 큰 승합차인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가 그쳤다. 아내에게 슬쩍, 비도 그쳤는데 세뉴 고개 넘어갈래? 라고 물었더니 절대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ㅎㅎ.
택시가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글라시에 마을에서 산장까지 오는 트레킹 루트로 온 게 아니고(그 길이 임도길이긴 하지만 차가 다닐 정도로 고르진 않은 길이라 괜찮을까 생각을 했었다) 트레킹 루트 옆 개울 건너 좀 도로 사정이 좋은 길이 통해져 있었다.
트레킹 기록
총 이동거리 : 5.1km
총 소요시간 : 2시간 44분
이동시간 : 2시간 16분
휴식시간 : 28분
획득고도 : 101m
2024년 7월 21일(일)
램블러 기록 : http://rblr.co/orILz

(계속 : 기상악화로 모테산장에서 꾸르마예르 택시 워프)
https://kimsunho.com/2024-tmb-06-mottets-courmay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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