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대종주

설악대종주 솔로 트레킹 : 남교리-서북능선-희운각대피소(1박)-공룡능선-소공원

설악의 계절이 닥쳐오니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인지 설악산 지도를 다시 펼쳐 놓고 들여다 보고 있다. 이번엔 “설악대종주”라 불리는 가장 난이도가 험악한 종주를 해보기로 했다. 설악대종주의 정석은 남교리에서 시작해 서북능선종주, 공룡능선을 거쳐 소공원에서 산행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2025년 9월 26일(금) ~ 27일(토) 1박 2일동안 완주했던 35.1km 설악대종주 산행후기를 풀어본다.

⭐ 설악대종주 코스

남교리(0km) – 복숭아탕(누적 4.2km) – 대승령(누적 8.6km) – 1408봉(누적 11.8km) – 귀때기청봉(누적 14.6km) -한계령삼거리(누적 16.2km) – 끝청봉(누적 20.3km) – 중청삼거리(누적 21.6km) -대청봉(생략가능, 중청삼거리에서 왕복 1.2km)- 소청삼거리(누적 22.2km) – 희운각대피소(누적 23.5km) – 무너미고개(누적 23.7km) – 신선대(누적 24.5km) – 1275봉(누적 26.5km) – 킹콩바위(누적 26.9km) – 큰새봉(누적 27.4km) – 나한봉(누적 28.1km) – 마등령삼거리(누적 28.6km) – 비선대(누적 32.1km) -소공원(누적 35.1km)

  • 중청삼거리에서 대청봉을 왕복하면 1.2km가 추가되어 총 누적거리는 36.3km가 된다. 즉 대청봉을 생략하면 35.1km가 된다.
설악대종주 코스 지도
설악대종주 코스 : 남교리-서북능선-희운각대피소-공룡능선-소공원
설악대종주 고도 프로파일
설악대종주 고도 프로파일 : 남교리-소공원

⭐ 일정 짜기 – 대피소 1박

솔로 종주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피소 1박을 해야 했다.
동호회나 산악회 등에서 단체로 트레일러닝식으로 종주를 하는 것과 솔로 종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단체 종주는 트레일러닝 조끼 정도만 매고 간단한 소지품과 음료만을 챙겨 몸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진행하면서 중간에 일행으로부터 중간 보급을 받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또 같이 움직임으로써 시너지 효과도 크다.
오로지 모든 준비물과 비상시까지 혼자 챙겨야 하는 솔로 종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필수품만 챙겨도 배낭 무게가 늘어나기 마련이며 짐이 무거워지는만큼 체력소모는 커지고 이동속도는 더디게 된다. 결국 희운각대피소나 소청대피소의 숙박은 안전한 종주를 위한 중간 기착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1박 종주를 결정하게 되면 대피소 숙식에 대한 짐이 추가되니 무게 조정을 잘해야 한다.

문제는 설악산 대피소를 알아 보고 있던 시점인 9월 중순 이후부터 10월까지 희운각대피소, 소청대피소는 평일까지 만석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가을 성수기라 하더라도 예전엔 평일에는 자리가 꼭 있었는데 언젠가부터인지 예약 오픈이 되었다 하면 싹쓸이다. 적어도 3가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중청대피소 숙박이 철거된 점이다. 둘째로 평일에 자유로운 은퇴한 1960년대 초중반생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많아진 점이 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대피소 숙박을 일부 안내산악회에서 대량 예약을 하고 재판매하는 불법적인 행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립공원공단측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응책이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설악산대피소 예약현황
글을 쓰고 있는 9월 28일에 본 설악산 대피소 예약 현황

대피소 예약이 어려워서 원하는 일정을 짜기가 매우 어렵다. 2인 이상 움직인다면 개인의 휴가 일정을 맞추기도 어렵고, 대피소 자리가 맞게 나는지 등 쉽지 않다. 한가지 팁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중기 일기예보에 비소식이 뜨면 취소분이 생기거나 위에서 보 듯 일정이 닥치면 갑자기 못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인지 취소분이 생긴다. 이러한 자리가 생기는지 틈틈히 들여다보며 겨우 한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9월 28일(일) 자리가 생겨서 냉큼 예약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예보 되어 있다. 다시 며칠간 예약 조회를 열심히 했더니 완벽한 일기예보가 예정되어 있던 9월 26일(금)에 희운각대피소를 예약 확정할 수 있었다. 종주 일정은 이렇게 9월 26일(금)~9월 27일(토)로 결정되었다. 완벽한 날짜라는 것이 예보상 수요일, 일요일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었고 종주당일에는 날씨예보가 좋았다.

⭐ 준비물

일기예보상 기온은 최저 13도, 최고 24도 맑음이었다. 또 예보만을 믿고 짜 맞추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으니…
첫날 뙤약볕 아래 귀때기청봉의 너덜길을 걸을 때는 기온이 31도까지 올랐을 때 얼린 음료수 생각이 왜이리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1박 2일치 짐을 꾸려야 해서 당일 산행 보다 짐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설악대종주 준비물
설악대종주 1박 2일 준비물 – 좌측 운행복, 우측 배낭 준비물

10kg은 안넘도록 최대한 맞추었다.
배낭무게는 약 9.8kg에 식음료가 4.6kg이나 되었다. 식음료를 계속 소진함에 따라 배낭 무게는 가벼워진다. 그리고 보급처인 희운각대피소에서 물 2.5리터와 이온분말3개를 구매해서 식사와 2일째 수분섭취에 사용하였다. 탄수화물 에너지용으로 샀던 맛밤과 맥스봉 등의 소세지가 생각보다 운행중에는 잘 먹히지 않았다. 역시 운행중에는 수분이 많은 귤같은 과일과 이온음료가 최고인 듯 하다. 종주를 완료하고 난 배낭 무게는 6.3kg 수준이었다.

다음은 준비물 상세 목록.

설악산 종주 준비물 목록
설악대종주 1박 2일 준비물

✔ 주의해야 할 수분 섭취

문제는 단백질 음료인 뉴케어 구수한맛 플러스 200ml를 희운각대피소까지 버틸 분량으로 8개를 가져갔는데 이게 에러였다. 작년에 지리산 화대종주 때 단백질 음료가 운행중에 잘 먹히고 효과적이어서 이번에는 새로운 타입의 단백질 음료를 코스트코에서 구매한 것인데, 설악산에서는 이것이 통하지 않았다.
12선녀탕계곡을 오를 때만해도 이 단백질 음료는 괜찮았다.
그런데 안산삼거리를 지나 대승령에 이르러 쉬면서 단백질 음료를 마셨더니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땀을 많이 흘렸으니 갈증해소는 되는 느낌인데 배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원인으로 사료된다.

1. 위장 혈류 감소
격렬한 운동 중에는 피가 근육과 피부로 몰려서 소화기관 혈류가 줄어들게 된다. 이 상태에서 단백질 음료(특히 두유처럼 소화에 시간이 걸리는 것)를 마시면 위에서 잘 안 내려가고 체한 듯 불편해질 수 있는 것이다.
2. 단백질/지질 소화 부담
두유, 단백질 음료는 단순 수분, 당분보다 소화가 훨씬 느리다. 위가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무겁게 느껴지고, 메스꺼움을 유발한다.
3. 위의 진동
등산 중 상하 진동이 계속 반복되니까, 위 속에 남아 있는 액체가 흔들리며 역류감이나 울렁임을 더 심하게 한다. 특히 걸쭉하거나 점성이 있는 음료는 더 자극일 수 있다. 실제로 서북능선을 힘겹게 가는데 헛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격렬한 등산 중에는 물, 이온음료로 대응해야 하고 단백질 음료는 운동 후 휴식하면서 보충해야 할 것이 맞다.

✔ 트레일러닝화 말고 중등산화 필수

설악대종주를 위한 등산화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몇년전부터 많은 등산인들이 전통적인 발목을 감싸는 중등산화에서 가벼운 트레일러닝화로 산에 오르고 있다. 고급 등산화에서만 쓰던 비브람 메가그립을 사용해서 젖은 바위나 경사면 등에서 안정적인 그립을 제공하면서도 가벼워서 트레일러닝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험준한 악산에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호카 오네오네의 트레일러닝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설악산 서북능선을 걸을 것이라면? 트레일러닝화 보다는 전통적인 중등산화를 강력 추천한다. 3년전 지리산 성중종주 때 나이키 페가수스3 트레일러닝화를 신고 오른쪽 발목을 2번 접질린적이 있었다. 작년 가을 지리산 화대종주에서는 호카 마파테4를 신고 유평마을 하산길에 똑같은 부위 발목을 접질렸다.

발목을 감싸지 않는 트레일러닝화는 설악산같은 험준한 산에서는 추천하지 않는다. 무게를 조금 손해보더라도 안전 우선이다. 더구나 솔로 종주라면 더더욱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번엔 오랜만에 잠발란 토페인을 다시 꺼내들었다. 토페인과 함께 한지 벌써 9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밑창도 한번 갈았는데 언젠가부터 늘 트레일러닝화만 신고 다니다 보니 신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설악대종주의 픽은 무조건 잠발란 토페인이다.
실제로 이번 설악대종주 때도 서북능선에서 오른발을 또 접질리는 순간이 발생했는데 발목을 두툼히 잡아주고 있는 토페인이 꺾임을 방지해주었다. 트런화였다면 고통에 나뒹굴었을 것이 분명했다.
또 남교리 코스를 새벽에 오른다면 안산삼거리 전후 대승령까지 좁은 풀숲길을 걸을 때 이슬 머금은 풀에 신발이 다 젖을 뿐만 아니라 발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러한 것을 견디기 힘들다면 발목까지 커버되는 고어텍스 등산화가 필수다. GTX(고어텍스) 트레일러닝화를 신더라도 발목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잠발란 토페인
9년차 잠발란 토페인

⭐ 남교리탐방지원센터로 이동

9월 25일(목) 퇴근 후 미리 챙겨둔 배낭짐을 챙겨 떠났다. 설악대종주의 들머리 남교리 주차장(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333-14)으로 향했다. 서울양양고속도로에서 동홍천IC에서 빠져 나와 44번 국도를 탔다. 양양고속도로가 생긴 뒤로는 거의 이용할 일이 없는 도로가 되어 버렸는데 정말 오랜만이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이다보니 차량 1대가 없는 적막감이 정말 진했다.

밤 10시경 남교리탐방지원센터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량 2대만 주차되어 있을 뿐이었다.
원래 계획은 두어시간 잠을 좀 자고 26일(금) 새벽 2시경 출발할 생각이었다.

남교리주차장 차박
남교리 주차장에서 잠시 쪽잠을 자려했으나 실패.

뒷좌석을 펴고 누워 잠을 청했는데, 휴게소에서 마신 커피탓인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뒤척이고 있자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자정에 가까워졌다. 밤 11시 30분경 조용하던 주차장에 차량 1대가 들어왔다. 택시다.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1명. 그 사람은 이내 12선녀탕계곡으로 진입했다.
잠도 오지 않는데, 새벽 2시 시작 계획을 바꿔서 나도 당장 준비해서 시작하기로 했다.

남교리주차장
11:41PM. 출격 준비.

산행 준비를 하는 동안 차량 1대가 더 들어왔다. 차에서 바로 내리더니 산행준비를 한다. 적어도 혼자는 아니구나.

⭐ 남교리 – 복숭아탕 – 대승령 8.6km

9월 26일(금) 자정 남교리 들머리를 출발했다. 기온은 17도였다. 보통 남교리 출입문은 종주꾼을 위해서인지 개방되어 있다. 12선녀탕계곡물 소리가 우렁차서 칠흑같은 어둠이 생각보다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30분전 쯤 앞서 가고 있는 사람, 곧 따라올 사람이 있다고 인식이 되니 더욱 그랬다.
남교리 들머리의 해발고도는 약 300m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계곡길 초입은 평지 수준으로 완만하게 오른다. 어느 정도냐하면 2km를 걸었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 1시간만에 헤드랜턴 방전

즐겨쓰는 헤드랜턴이 Petzl의 티카 RXP다. 구매한지 9년이나 되었다. 올 봄까지만 해도 잘 썼는데 1시간 운행하고 나니 방전이 되어 버렸다. Full 충전해왔는데 1시간만에 방전될 줄이야… 라이트가 나가니 한치앞도 안보이는 어둠에 계곡물소리만 들려오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여분의 비상용 랜턴(크레모아 미니)을 가지고 와서 스틱과 함께 손에 쥐고 운행 대응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비상용 미니 랜턴도 구매한지 8년이나 되어서 이것마저 문제가 생긴다면 정말 끔찍했을텐데 다행히 그런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진 6시경까지 거의 5시간 라이팅에 문제가 없었다.

응봉폭포를 지나 2km 를 더 가면 12선녀탕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복숭아탕이 나온다. 남교리 기점 4.2km 지점이다. 복숭아탕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시 41분. 먼저 출발했던 분, 내가 출발한 뒤 곧바로 뒤이어 따라오셨던 분이 벌써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복숭아탕 폭포수를 감상하고 있었다. 복숭아탕은 바위벽에 복숭아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의 깊은 구멍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생각보다 웅장해서 다음에는 낮에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복숭아탕
복숭아탕. 1:41AM.

✔ 휴식1 : 1:46-1:52AM (4.3km지점)
복숭아탕을 지나 데크 계단을 조금 올라 처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바나나1, 뉴케어(단백질음료) 200ml 섭취.
이 때만 해도 단백질 음료 섭취에 별 이상은 없었다. 6분 휴식 후 출발.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며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3km 정도를 더 갔을까? 뒤에서 헤드랜턴 불빛이 빠른 속도로 따라오더니 급기야 나를 추월해 지나갔다. 2명이었는데 12시 50분 경 남교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2시 31분 5.7km 지점이었는데 이들은 정말 빨랐다. 종주꾼들은 넘사벽이다.

600미터 정도 더 가니 계곡물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렁찬 계곡물소리가 갑자기 안들리게 되니 신기하기도 했다. 동시에 적막감이 좀 불안해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걷기 시작했다. 앞쪽, 그리고 우측의 안산과 뒤로 응봉을 사이골을 지나 대승령으로 향하고 있다.
오전 3시 26분(남교리 7.2km 기점) 2명의 산객이 어느새 뒤에서 나타났다. 알고 보니 앞서 먼저 갔던 2명의 종주꾼과 일행이라고 한다. 즉 일행이 총 4명이다. 2명은 대종주를 진행하며 빠르게 이동한 것이었고 이 2명은 그들을 support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계령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또 나보다 30분 먼저 출발했던 분을 이 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따지고 보니 나까지 총 7명(나, 나보다 30분 먼저 출발했던 분, 내 뒤에 곧바로 출발했던 분, 4명의 일행) 이 남교리에서 산행을 하고 있으며 이 서포터 2명을 제외한 5명이 대종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안산에서 뻗은 줄기로 가파르게 오르고 나면 안산삼거리에서 대승령까지는 해발고도를 약 200미터 정도 내린다. 좁은 길에 풀숲과 작은 나무 가지들(아마도 털진달래)이 한사람을 겨우 지날만한 길을 만들어 팔, 다리를 긁으며 지나칠 수 밖에 없다.

대승령 가는길
대승령으로 향하는 길

⭐ 대승령 – 1408봉 – 귀때기청봉 – 한계령 삼거리 7.6km

오전 4시 11분, 드디어 대승령(1210m)에 도착했다. 앞서 갔던 종주꾼 서포터 2명이 자리를 깔고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뒤이어 남교리에서 30분 먼저 출발했던 분이 도착했다. 이분과는 1408봉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게 된다. 결국에 내가 축축 처지게 되었지만…

대승령
대승령. 4:11AM.

하늘엔 별이 쏟아졌다.

오리온자리
오리온자리

✔ 휴식2 : 4:11-4:28AM (8.6km지점, 대승령)
숨을 돌리며 에너지원을 충전해야 했는데 탄수화물로 챙겨온 맛밤이 의외로 먹히지 않음을 알았다. 밤을 한 입 무는 순간 목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곧바로 뉴케어 단백질 음료를 들이키니 목의 갈증은 해소가 되는데 어째 배가 더부룩해진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격렬한 운동 중에 소화기관 혈류가 줄어든 상태에서 소화가 상대적으로 느린 단백질 음료는 무겁게 느껴지고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걸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리산 종주 때는 괜찮았는데 아닌가 보다. 얼린 이온음료 토레타 500ml가 있긴 했지만 이상황에선 아껴야 했기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갈길이 구만리인데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오전 4시 28분 기온 11도, 대승령을 출발, 서북능선 종주가 시작되었다. 대승령에서 중청삼거리까지를 서북능선이라 칭한다. 2명의 종주꾼 서포터들은 이미 출발한 뒤였다. 대승령에서 한동안은 부드러운 길로 서북능선의 워밍업을 한다.

✔ 휴식3 : 5:46-5:59AM (10.8km지점)
1시간 20여분, 약 2.2km를 더 진행하고 다시 쉬었다(해발 1292m). 다시 맛밤과 뉴케어를 먹는데 정말 먹히지 않아 어거지로 밀어 넣는 수준이었다. 6시 정도 되니 날이 확 밝아져 랜턴은 껐다.

서북능선 시그니처 나무
서북능선 시그니처 나무. 10.9km 지점. 6:09AM.

1408봉으로 향하는 길은 점점 힘들어졌다. 급경사가 많아지고 가파른 계단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도를 1400m대까지 올리면 좌측으로 큰감투봉이 뻗어 있고 우측으로는 한계령으로 향하는 골짜기 도로(설악로)와 맞은편 가리봉, 주걱봉이 장관을 이룬다.

설악산 안산 조망
지나온 능선이 바위절벽 뒤로 보인다. 솟아 오른 봉우리는 안산. 안산의 우측 지점을 넘어 대승령을 거쳐 온 것이다. 6:44AM

계단을 가파르게 오르면 360도 파노라마 뷰가 펼쳐진다. 지나온 서북능선, 서북능선과 가리봉 사이 골짜기 도로를 가득 메운 운해가 장관을 이루었다.

서북능선
6:48AM. 지나온 서북능선. 맨뒤 뾰족 솟아 오른 것이 안산.
가리봉 주걱봉
6:48AM. 가리봉과 주걱봉
원숭이 바위
6:51AM. 원숭이 바위

✔ 휴식4 : 6:59-7:19AM (11.8km지점 1408봉)
6시 59분, 1408봉에 도착했다. 귀때기청봉까지 2.8km라는 팻말이 1408봉의 정상석 역할까지 하며 서있다.
귀때기청봉도 그렇고 1408도 정상석이 따로 없고 이정표 팻말에 표시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1408봉은 이름도 없이 해발고도를 갖다 붙인 봉우리일 뿐이다. 1408봉 옆의 큰감투봉은 서북능선에 대해 직각으로 뻗은 줄기로 1408봉 전후로 보면 마치 감투같은 모양으로 넓적하게 뻗어 있다.

1408봉
1408봉 정상. 7:00AM
서북능선 공룡능선조망
1408봉에서 본 진행방향. 멀리 공룡능선과 중청봉이 보인다. 맨 오른쪽 큰 산은 귀때기청봉. 7:11AM.
서북능선 북쪽 조망
북쪽.

1408봉에서 주변을 둘러 보는 사이 남교리에서 30분 먼저 출발했던 분이 도착했다.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1408봉에서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분은 대구에서 왔다고 한다. 50대 후반 또는 60대 정도로 보였는데 더 늦기 전에 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설악대종주 도전을 한다고 말했다. “더 늦기전에”라는 말이 어쩐지 와 닿는다. ㅎㅎ. 이분도 희운각대피소 1박을 한다고 하니 나랑 똑같은 일정으로 걷는 것이다. 1408봉 이후로는 내가 축축 처지게 되어 다시 만날 수는 없었고 저녁때 희운각대피소에서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1408봉에서는 20분을 쉬며 브리치즈, 맥스봉, 딸기음료를 섭취했다. 바위에 걸터 앉아 잠시 눕기도 했다. 1408봉 하산길은 매우 급격한 경사의 계단을 통해 내려간다. 경사도가 급해서 조심히 내려가야 한다.

1408봉
1408봉을 뒤돌아 보며. 7:25AM.

1408봉에서 귀때기청봉 구간이 서북능선의 하이라이트라 할만큼 경치가 좋으면서도 힘겹고 어려운 구간이다. 1408봉에서 급격히 하강하고 나면 다시 1400미터대의 무명의 커다란 봉우리를 넘어야 하며 귀때기청봉이 코앞에 닿을 듯 목전에 보이는데 크고 작은 업힐, 다운힐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서북능선 귀때기청봉
서북능선 진행방향. 가운데 가장 높이 솟아 오른 봉우리가 귀때기청봉. 귀때기청봉 왼쪽 뒤로 자그맣게 중청봉이 보인다. 7:25AM.
귀때기청봉 오른쪽
귀때기청봉의 오른쪽. 7:25AM.
서북능선 조망 점봉산
7:34AM.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7시 44분, 12.2km 지점, 처음으로 반대편으로 진행하는 사람들(4명)을 마주했다. 한계령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 휴식5 : 7:50-8:02AM (12.6km지점, 벤치쉼터)
오전 7시 50분, 벤치쉼터에 도착했다. 지칠대로 지쳐 짐과 신발을 풀고 잠시 누웠다. 누워서 체력과 에너지를 회복하는 전략이다. ㅠ

자잘한 업다운이 지속되는 능선이다. 큰 바위길 등은 다리를 들어올리는 폭을 최대치로 만들고 올린 한다리로 몸을 끌어올리고 이걸 반복하다 보니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더구나 계속 밀어 넣어왔던 단백질 음료의 소화가 더디어서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전 9시 30분 이전엔 기온이 20도 미만으로 꽤 쾌적했다는 것이다.

서북능선 너덜길

8:09AM. 12.8km 지점. 너덜길이 시작되었다. 진행방향 뒤돌아본 모습. 왼쪽 주걱봉, 지나온 1408봉. 올 봄만해도 길을 안내하는 쇠봉과 줄이 없었다. 올 봄에 아내와 서북능선종주 때 우연히 만났던 타 카페 동호회 회원 일행이 이곳에서 길을 잃고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적이 있었다.

✔ 휴식6 : 8:36-8:46AM (13.1km지점)
오전 8시 36분, 다시 휴식을 취하며 단백질 음료를 먹었다. 고작 500여미터 나아가는데 34분이나 걸렸다.

오전 9시 4분, 귀때기청봉 1.2km 남았다는 팻말 위치에 이르렀다(기온은 18도).
이제 눈 앞에 귀때기청봉이 보인다. 금방 닿을 것 같이 보이는데 무려 1시간 25분이나 걸렸다. 기온이 점점 상승하는데 나무 그늘이 없어지고 너덜길에 가파른 오르막이 진행을 더디게 했다.

귀때기청봉
9:05AM. 귀때기청봉.

오전 9시 43분, 14.1km 지점, 너덜길이 시작되었다. 힘들지만 동시에 가리봉 너머 운해 전경이 이를 상쇄해주는 듯 했다.

서북능선 남쪽 조망
9:43AM.

✔ 휴식7 : 10:14-10:17AM (14.4km지점)
오전 10시 14분, 귀때기청봉 200미터를 남겨두고 다시 쉬었다. 한방에 오르기가 버거울 정도로 지쳐 있었다. 아직도 갈길이 먼데 걱정스러웠다. 파워가 바닥이다. 한 발 한 발 겨우 올려놓는 식이다.

✔ 귀때기청봉10:29AM (14.6km지점)
오전 10시 29분, 드디어 귀때기청봉에 도착했다. 그늘이 없는 곳의 순간 온도는 31도까지 치솟았다.

귀때기청봉  정상
10:29AM. 귀때기청봉(1578m). 귀때기청봉 정도면 버젓한 정상석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도 될 봉우리인데 이정표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408봉에서 귀때기청봉까지 거리가 2.8km다. 일반적인 산행 표준 속도 2km/h 기준으로 보면 1.4시간, 즉 1시간 24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설악산에서 평속 2km/h는 매우 빠른 속도에 해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2.8km를 무려 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1408봉에서 귀때기청봉 2.8km구간을 0.8km/h의 거북이 걸음으로 걸은 셈이다.
하도 힘들어서 이 구간에서 많이 쉰 탓도 있다.

✔ 휴식8 : 10:29-10:53AM (14.6km지점, 귀때기청봉)
귀때기청봉에서 처음으로 귤2개, 육포, 그리고 얼음으로 시원한 토레타를 섭취했다. 지금까지 어거지로 꾸역꾸역 먹어왔던 단백질 음료, 맛밤, 맥스봉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몸이 극도로 지쳐 있어서인지 온몸이 충전되는 듯한 느낌이 배가되었다. 과일이 주는 청량감이 대단했다.
타이벡 매트를 바닥에 깔고 누워버렸다.

한참을 누워 있으니 그래도 에너지가 다시 보충되는 느낌이다. 비록 파워는 바닥이어서 오르막은 한발자국을 옮기기가 힘든 상황이지만 한계령삼거리까지는 이제 내리막이니 다행이다. 까탈스러운 너덜길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오르막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귀때기청봉-한계령삼거리는 약 1.6km이고 이중 1.1km 정도가 지속적인 큰바위 너덜길에 해당한다.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착지점에 바위틈 사이로 미끄러지기 일쑤인 스틱 사용은 까다로와서 여간 힘든게 아니다.

서북능선 너덜길
11:18AM. 진행방향. 너덜길이 이어져 있다.

✔ 휴식9 : 11:26-11:42AM (15.3km지점)
태양빛에 오픈된 너덜길의 기온은 28~29도 수준이었는데 정면으로 마주한 해를 막기 위해 버프까지 하니 꽤 더웠다. 오전 11시 26분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16분 휴식을 취했다. 허기와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다시 맛밤과 단백질 음료를 쑤셔 넣었다. ㅠ

용아장성 공룡능선 조망
11:46AM.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우측 중청봉과 대청봉.

⭐ 한계령삼거리 – 끝청봉 – 중청삼거리 5.4km

12시 29분, 16.2km 지점, 드디어 한계령삼거리(1353m)에 도착했다. 귀때기청봉에서 내리막길임에도 1.6km 진행에 1시간 36분이나 소요되었다. 중청삼거리에 오후 서너시 경 도착한다면 대청봉까지 가볼까 했는데, 현상태로는 시간적 여유도 체력적 여유도 없었기에 대청봉은 건너뛰어야 할 판이었다.
갈길이 아직 멀고 기온이 최고조 시간대인데 이젠 도저히 먹히지 않는 200ml 단백질 음료들을 제외하면 토레타 몇 모금, 귤4개, 딸기 음료 1개 전부였다. 이 때 여유롭게 얼음물을 먹고 있는 산객이 보여 염치 불구하고 물한모금만 얻어 마실 수 있냐고 하자, 그 분은 흔쾌히 여유분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방울토마토도 주셨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일행은 남는 물을 채워주겠다고까지 말하고 카타딘 비프리에 물을 채워주셨다. 그러면서 잘 물어보셨다고 말하며 미안한 마음을 없애주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그들은 한계령에서 막 올라와서(2.3km) 여유가 있었으며, 소청대피소에서 1박 후 공룡능선을 간다고 한다. 나의 남교리 여정을 말해주자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더운데 고생이 많았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 휴식10 : 12:29-12:49PM (16.2km지점, 한계령삼거리)
한계령삼거리에서 20분을 쉬고 나서 다시 힘을 내어 이동했다.

귀때기청봉, 1408봉 전후의 극악의 코스를 걸었다면 이제부터는 상대적으로 얌전한 편이다. 한계령삼거리에서 중청삼거리까지는 완만하게 고도를 높인다. 한계령삼거리가 1353m이고 끝청에 이르면 1610m다. 중간에 무명의 봉우리가 하나가 더 있다. 평지와 내리막은 중력의 힘을 받아 물흐르듯이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파워가 거의 바닥이어서 오르막은 단 한걸음도 발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 휴식11 : 1:34-1:43PM (17.2km지점)
계단에 오르며 걸터 앉아 9분간 쉬었다.

✔ 휴식12 : 2:00-2:09PM (17.5km지점)
다시 가파른 계단에 오르며 계단 중간에 걸터 앉아 9분간 쉬었다. 귤2개를 먹고 토레타 한모금을 마셨다.

중간 봉우리를 넘고 나면 끝청봉에 오르기 전까지 1km 정도는 그야말로 꿀길이다. 평지길인 것이다. 물흐르듯이 힘을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 휴식13 : 2:52-3:02PM (18.7km지점)

✔ 휴식14 : 3:29-3:35PM (19.6km지점)
끝청으로 올라서기 전 마지막으로 바위에 털썩 걸터 앉았다. 남은 귤 2개와 물을 들이키고 끝청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 휴식15 : 3:53-3:55PM (20.1km지점)
끝청 바로 직전 의자처럼 늘어진 나뭇가지에 잠시 걸터 앉았다가 다시 힘을 내어 본다.

오후 4시 6분, 드디어 끝청봉에 도착했다. 지나온 서북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끝청봉 조망
4:07PM. 끝청봉에서 본 지나온 길.

끝청봉에서 약 1.4km 정도 더 가면 중청봉의 남쪽 중턱을 지나 중청삼거리에 다다른다. 끝청봉을 지나 어디서부턴가 조우한 커플 산객과 싱글 산객과 중청삼거리까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가끔 이런식으로 함께 걷게 되면 일정 거리동안 시너지 효과로 홀로 걷는것보다 힘을 내어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중청삼거리 – 소청삼거리 – 희운각대피소 1.9km

오후 4시 44분, 중청삼거리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바위에 걸터 앉아 쉬었고 뒤따르던 2팀은 멈추지 않았다. 대청봉을 다녀오면 1시간은 추가로 소요된다.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였고 더구나 대피소 입실은 오후 7시가 마지노선이었기에 대청봉을 굳이 찍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 휴식16 : 4:44-4:54PM (21.6km지점, 중청삼거리)

대청봉
4:56PM. 중청삼거리에서 본 대청봉
천불동계곡 희운각대피소
5:02PM. 소청가는길에 본 천불동계곡. 좌측에 희운각대피소가 보이고 공룡능선 신선대가 있다.
소청가는길
5:07PM. 진행방향 좌측. 기울어진 해에 지나온 서북능선이 아득히 보인다. 우측 앞쪽으로 용아장성.

오후 5시 21분, 소청삼거리에 도착했다. 소청대피소에서 올라온 부자(父子)로 보이는 분들이 대청봉에 다녀오는 소요시간을 물었다. 랜턴을 챙겼는지 확인하고 이 곳 기준 왕복 1시간 30분은 걸릴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소청삼거리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약 1.3km로 급격히 내려간다. 내리막이라고 해서 편안한 것도 아니다. 너덜길인데다 초반에는 발을 고르게 디딜 수 있는 게 아니라 불규칙한 착지점들의 연속이라 속도를 내서 내려가기도 어렵다. 피로감이 급상승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워를 끌어내지 않아도 되는 내리막이라는 것이다.

✔ 휴식17 : 5:37-5:43PM (22.5km지점)
너무 300미터 쯤 이동 후 계단에 걸터 앉아 다시 쉬었다. 마지막 남은 음료인 딸기 쥬스 팩을 마셨다.

희운각대피소 내려가는 길
6:06PM. 공룡능선.

이 후로는 쉼없이 계속 내려가 오후 6시 28분, 드디어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다.

⭐ 희운각대피소(1박) – 공룡능선 – 소공원 11.6km

대피소 체크인을 하자마자 매점에서 곧바로 물과 링포티 분말(이온 분말)을 사서 500ml를 즉석에서 다 마셨다. 대피소 직원은 고생했다며 식염포도당을 주셨다. 식염포도당과 이온음료를 마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지만 챙겨온 컵라면과 햇반을 해먹을 힘까지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다음날 공룡능선이고 뭐고 그대로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휴식18 : 6:28PM-익일 7:26AM (23.5km지점, 희운각대피소)
짐을 좀 정리하고 밥도 안먹고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다. 원래는 공룡능선을 타든 천불동으로 하산을 하든 새벽같이 일어나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5시간 동안 라이팅을 한 랜턴 충전을 대피소 직원에게 부탁을 했고(5핀 케이블이 필요한데 챙기지 못했다) 직원이 충전을 해주는 사이 내가 잠이 들어서 대피소 관리실 문을 닫기 전(밤 9시 소등전)까지 랜턴 회수를 하지 못했다. 결국 매점 오픈 시간인 익일 7시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겨 나서는 것이다. 나도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랜턴회수를 위해 7시까지 강제(?) 지체를 해야 했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이 생겨 괜찮았다.
여유롭게 짐을 챙기고 컵라면, 햇반, 참치캔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7시가 넘으니 소청대피소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희운각대피소 매점 오픈 시각에 맞추어 산행계획들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물을 사는 사람들, 아침식사를 이곳에서 하는 사람들 등…

희운각대피소
7:24AM. 희운각대피소를 떠나며


어제 저녁때만 해도 오늘 아침에 그냥 천불동으로 하산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래도 하룻밤 잠을 자고 나니 에너지가 어느 정도 채워져서인지, 공룡능선으로 가는 것으로 마음이 다시 굳어졌다.
500ml 물 4개와 링포티 2개를 더 사서 대피소를 나섰다. 산행 내내 나에게 맞지 않았던 단백질 음료는 비상용으로 1개만 남기고 옆에 계신 분들께 나눠드렸다.

오전 7시 26분(14도), 희운각대피소에서 출발했다. 무너미고개까지 약 200m, 무너미고개에서 마등령삼거리까지 4.9km로 이 구간이 바로 공룡능선에 해당한다.

✔ 휴식19 : 8:04AM-8:06AM (24.3km지점, 신선대)
신선대에서는 간단히 인증사진 정도만 찍고 이동했다. 여느때였다면 신선대에서 적어도 30분간은 경치를 감상하며 여유를 부렸을텐데 이번엔 이미 계획보다 늦어진 시간탓인지 마음의 여유가 많지 않았다.

신선대 하산 조망
8:14AM. 신선대에서 하산하면서 본 공룡능선. 동풍이 꽤 불었는데 능선을 넘어가는 구름이 마치 뱀이, 아니 용이 꿈틀대듯 넘실거렸다. “구름이” 담넘어가듯이 넘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공룡능선
8:37AM.
공룡능선
8:40AM. 여길 올라서면 내설악이 한눈에 조망된다.
공룡능선에서 보는 대청봉
8:42AM(17도). 구름에 휩인 좌측부터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해는 쨍쨍했지만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다.
공룡능선에서 보는 내설악
8:42AM. 귀때기청봉(맨 뒤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을 위시한 서북능선, 그 앞쪽으로 용아장성 등 내설악이 한눈에 보인다.
공룡능선의 까마귀
8:45AM. 천화대 능선을 향하며 보는 기암괴석의 향연. 바위 꼭대기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천화대 너머 1275봉
8:46AM. 천화대로 가는 길에서
1275봉
8:57AM. 천화대에서 보는 1275봉. 이때부터 구름이 능선의 봉우리들을 더욱 감싸기 시작했다.
천화대
9:21AM. 뒤돌아본 천화대. 어느새 구름에 휩싸여 있다.

✔ 휴식20 : 9:47AM-10:01AM (26.5km지점, 1275봉)
오전 9시 47분, 1275봉에 도착했다. 짭조름한 육포를 먹고 이온물을 마시니 파워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기온은 서서히 오르는데(20도) 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바람이 불어 다행이다.

큰새봉 킹콩바위
10:12AM. 큰새봉(좌)과 킹콩바위.
킹콩바위
10:17AM(17도). 킹콩바위 (26.1km 지점)

✔ 휴식21 : 10:57AM-11:09AM (26.7km지점, 큰새봉)
큰새봉에 이르러서는 바로 밑 넓직한 바위에 아예 누워버렸다.

서북능선 조망
11:50AM. 나한봉을 지나 바위능선에서 본 구름에 휩싸인 지나온 서북능선이 맞은편에 보인다.

12시경 나한봉에서 마등령삼거리로 고도를 완만히 낮춰갈 때 이제 공룡능선에 진입해 호기롭게 홀로 걷고 있는 외국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희운각대피소 숙박을 하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하며 대청봉까지 갔다가 하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룡능선의 표준소요시간은 4시간 40분, 공룡능선이 끝나는 무너미고개에서 소청봉삼거리까지가 1시간 30분, 소청봉삼거리에서 대청봉까지 40분이다. 종합하면 마등령삼거리에서 대청봉까지 6시간 50분이 소요된다.
랜턴이 있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설악산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온 것이 분명했다. 6시면 어두워지기 시직하고 랜턴이 없으면 한치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깔린다고 얘기해주었다. 대청봉까지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니 각 지점 소요시간을 알려주고 가다가 시간 계산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되돌아 오라고 당부했다.

✔ 휴식22 : 12:07PM-12:15AM (28.6km지점, 마등령삼거리)
오후 12시 7분, 마등령삼거리에 도착했다. 누가 반가운 인사를 하길래 봤더니 전날 한계령삼거리에서 물을 나눠주셨던 일행이다.

마등령삼거리에서 마등봉을 향해 살짝 오르다 마등봉, 황철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은 비탐구간으로 막히고 비선대쪽으로 하산해야 한다. 마등령삼거리에서 비선대까지는 3.5km로 매우 가파르다.

✔ 휴식23 : 1:53PM-2:08AM (31.1km지점, 마등령1쉼터)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진군을 한 것 같다. 홀로 무념무상으로 걷다가 어느새 누군가와 말없는 동행을 하기도 하다 보니 데크 쉼터까지 이르렀다. 작년에 TMB에 가기 전에 가족하이킹으로 5월에 공룡능선을 다녀왔을 때(아래 링크 참조) 바로 이곳에서 소중한 물을 보급받았었다.

금강굴에서 비선대는 0.6km인데 한걸음 내달을 거리정도인데 왜 이리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비선대 하산길 천불동
2:34PM. 비선대 하산길에서 보는 천불동.

비선대(남교리 기점 32.1km)에 이르렀을 때 소공원까지는 아직 3km가 더 남았지만 그 성취감은 이미 극에 달했다.

소공원 가는길
3:10PM. 소공원으로 가는 길

오후 3시 43분, 35.1km의 설악대종주 대장정을 마쳤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은 여정이었지만 소공원 상가에서 먹은 벌꿀아이스크림만큼 달콤했다.

벌꿀아이스크림
벌꿀아이스크림. 소공원에서.

⭐ 설악대종주를 마치며 / 기록

솔로 종주는 중간 보급 지원없이 온전히 혼자서 다 챙겨서 하니 무박 종주인 경우 늘어나는 짐 부담으로 웬만한 등력이 아니고서야 너무 어렵다. 1박 종주여도 대피소 숙식에 대한 짐이 추가되니 무게 조정을 잘해야 한다. 전날 저녁 6시 30분 경 희운각대피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다음날 무조건 천불동으로 하산하리라 마음먹을 정도로 그야말로 초죽음 상태였다.
원래는 새벽2시 남교리 출발예정으로 26일 밤 10시경에 도착했다. 쪽잠을 좀 자려고 차안에 누웠는데 잠이 안왔다. 그런데 11시 30분쯤 택시타고 오신분이 올라가길래, 잠도 안오고 해서 나도 부랴부랴 챙겨서 자정에 출발했다.
이날 나까지 총 6명이 26일 밤 11시 30분~ 27일 새벽 1시 사이에 남교리에서 종주를 시작했다. 2명은 일행이었고 나를 포함 4명은 솔로종주였다. 6명중에 내가 제일 뒤쳐저서 갔는데 서북능선을 종주하면서 내 뒤로 오는 사람은 한명도 없어서 이날 종주는 6명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후기들을 보니 다른 1명이 뒤이어 오고 있었다. 비록 그 분은 종주에는 실패를 했다고 하지만…
나도 귀때기청봉 정상, 끝청 오르막 전에 자리깔고 바닥에 누워 에너지 충전하면서 겨우 갈 수 있었다. ㅎㅎ
나같은 경우는 단백질음료를 잘 챙기는데 이번에 새로운 제품을 픽해서 갖고 왔더니 완전 몸에 안맞는 것이어서 헛구역질에 정말 고생을 좀 했다. 한계령삼거리에서 귀인(?)을 만나 물 500ml를 얻고서 희운각에 도착직전까지 극적으로 수분 섭취를 겨우 할 수 있었다.
희운각에서 저녁도 안먹고 계속 잠만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의외로 그 강렬했던 하산 생각은 좀 밀려나고 공룡능선을 타고 완주를 할 수 있었다.

이동거리 : 35.1km
소요시간 : 1일 15시간 44분
휴식시간 : 17시간 2분(4시간 4분 + 희운각대피소 12시간 58분)
이동시간 : 22시간 42분
이동평균속도 : 1.55km/h

설악대종주 기록
설악대종주 기록

다음을 기약하며…

설악산 산행 시리즈(최신순)

설악산 서북능선 종주 후기 : 오색-대청봉-중청삼거리-끝청봉-한계령삼거리-귀때기청봉-1408봉-대승령-장수대
https://kimsunho.com/2025-seoraksan-osaek-jangsoodae-hike/

설악산 솔로 하이킹 오색-대청봉-공룡능선-소공원 후기 : 조망, 코스 리뷰
https://kimsunho.com/2025-seoraksan-osaek-dinoridge-hike/

설악산 오색 코스 난이도, 소요시간 분석 | 신선대 조망
https://kimsunho.com/2024-seoraksan-osaek-sogongwon/

설악산 공룡능선 가족산행기 : 소공원 원점회귀 코스 리뷰(2024)
https://kimsunho.com/2024-seoraksan-dinoridge-hike/

설악산 공룡능선 후기 | 상세한 코스 리뷰
https://kimsunho.com/2022-seoraksan-dinoridge-hike/

트레인의 설악대종주 유튜브 영상 – 날 것 그대로.

트레인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네이버 카페 트레인 알피니즘 : https://cafe.naver.com/trainalp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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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안녕하세요, 9월 26일 새벽 4시에 남교리에서 출발해서 소청봉 대피소에서 1박하고, 백담사쪽으로 내려갔습니다.(고원카페 답글 주신거 보고 같은 분이신거 같아서 반갑게 댓글 답니다.)종주 다시 고민 중인데, 아무래도 가방 무게도 줄이고, 출발 시간도 당겨야 할거 같습니다.

트레인님 덕분에 많은 정보 얻어갑니다.

Last edited 3 months ago by 코리
트레인TRAIN

아 그러셨군요. 글 기억납니다. 반갑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시지요^^ 말씀하신대로 시간 배분 잘하시고 배낭 무게는 최대한 줄이시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ㅇㅇ

서북능선이 설악에서 제일 힘든 코스인거 같아요ㅎㅎ

트레인TRAIN

맞습니다. 제일 힘든 코스가 서북능선이예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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